[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64)한경면 용수리
입력 : 2024. 05. 17(금) 00:00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드넓은 경작지와 기름진 바다가 정겨운 마을
[한라일보] 마을 서쪽 당오름에 올라 내려 보는 모습은 풍요의 땅이다. 저수지에 가득 담긴 수자원을 기반으로 쌀농사가 가능했던 섬 제주의 몇 안 되는 마을이다. 어족자원과 해산물이 풍성하여 예로부터 어민들이 풍어를 노래하던 곳. 한마디로 자연과 사람이 만나 서로 행복한 마을이다. 자연이 이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심성 때문에 더욱 행복할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만큼이나 스토리가 풍성한 마을이다. 동네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보면 시간 중 모르는 마을. 원래 두모리라고 하는 대촌에서 다섯마을이 떨어져 나왔는데 그 중에 한 마을이다. 이 곳에는 가뭄에도 샘물이 너무 잘 나와 다른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숭숭물'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명 승수리(勝水里)로 부르다가 100여 년 전부터 용수리라는 이름으로 바꿔부르게 되었다. 탐라지의 기록으로 추측하는 용수리의 역사는 이렇다. 고려 공민왕 원년 (1352년) 우포에 왜선이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태종 18년 (1416년) 왜적이 우포, 차귀도 등에 침입하였다. 마을의 형태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는 사료에 입각하여 보면 400여 년 전. 절부암 옆 '굴터'라고 하는 곳에 도요지가 있었다. 도공들이 필요로 하는 양질의 흙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었음을 의미한다.

신상범 이장
매년 음력 3월 15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절부암에 모여서 마을제를 지낸다. 바다에 나가 행방불명된 남편 강사철을 찾아 몇 날 며칠을 바닷가를 헤매며 울부짖다가 끝내는 남편 곁으로 간다며 엉덕동산 후박나무에 목을 맨 열부 고씨. 3일장을 치르던 날 아침에 남편 강사철의 시신이 부인이 목을 맸던 언덕 아래 떠올랐다고 한다. 그 사연과 절개를 기리는 제사다. 1853년 철종 때 일. 대정판관이 고씨가 목을 맨 자리에 '절부암'이라고 하는 글씨를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해지도록 했다. 돌에 새긴 글씨가 강직하고 깊이가 있다. 풍기는 그 자체로 절개를 느끼게 하는 기품이 서려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 뭉클하게 한다.

용수리는 기념비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박해로 신음하는 조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사제 서품 즉시 귀국길에 오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일행이 1845년 8월 31일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귀국시에 풍랑을 만나 28일을 표류하다가 결국 표착하여 첫발을 디딘 용수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역사적 장소다. 세월이 지나 제주의 신앙 후손들이 나서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을 길이길이 새겨두기 위해 용수리 바닷가에 기념관을 세웠다.

80년대 중반까지 250가호가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상대적 풍요로움을 누렸던 사람들의 땅. 섬 제주에서 가장 큰 저수지가 있는 마을답게 농업경쟁력 최강의 마을이었다. 지금은 논농사가 경쟁력을 잃어 옛 명성은 퇴색되었지만 조상대대로 이어져온 근면성은 여전하다. 다양한 활로를 찾아 옛 영광을 복원하려 하고 있다.

신상범 이장에게 용수리가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을 물었다. 대답은 참으로 파격적이고 독특하다. "부부금실이 세상에서 으뜸이지요!" 절부암에 얽힌 사연을 들으며 성장한 이유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부부애가 마을공동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화목한 가정이었기에 그 엄청난 농어업 노동을 이겨내고 풍요로운 마을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 마을 최고령 부부이신 양윤태(91세) 김춘직(87세) 어르신을 소개하며 장수비결은 부부애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마을의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용수저수지는 논농사를 위한 효용성이 퇴색되었다고 방치 할 수 없는 생태자원이다. 이에 대하여 마을공동체가 수질관리를 염려할 정도의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는 것에 비해 행정적 지원이나 획기적인 활용방안이 실천적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아 보인다. 물은 흘러야 맑아지는 법이라고 했으니, 지금 휴경지 상태의 논밭을 통하여 바다로 물이 흘러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 할 수 있어야 섬 제주 최고 면적 저수지는 새로운 활로를 찾을 것이다. <시각예술가>

부농의 트랙터
<수채화 79cm×35cm>

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난 길, 돌담 옆에 정차되어 있는 트렉터와 눈부신 봄햇살 속 집들 모습. 그리고 멀리 당산봉 자락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태양광선의 강렬함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였다. 참으로 빛나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길을 그리기 위한 원근법으로 보이나 실은 농기계의 무게와 집들의 무게를 부등식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다. 섬 제주의 농촌마을 치고는 곧은길이다. 평야지대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길. 마을의 자연적 특색이 정주공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트렉터가 주는 농업상징성을 통해 용수리의 농업을 표현하고 싶었다. 소박한 집들은 수 십 년 전에 지어진 그대로다. 오히려 정감이 샘솟는다. 담장들 또한 이웃과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이니 아니 그릴 수가 있겠는가? 멀리 소실점 부근에 정차된 소형승용차가 어떤 시대적 여운을 전달하고 있어서 좋다. 오른쪽 근경에 종려나무는 구도적 자연미까지 노래하고 있다.

누구의 트렉터일까? 저 집들에 사는 주인들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농촌마을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육중한 기계장치가 이토록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보편화된 농촌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그러하리라. 불과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저 길엔 말과 소가 끄는 달구지가 대부분 농산물을 날랐을 것이다. 달라진 모습을 그리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회화적으로 너무 밝은 집들이 지닌 가벼움을 트렉터라는 무게감이 있어 균형과 보완을 담당하였다. 황금비가 넘실거리는 구도다.



절부암 앞 바닷물
<연필소묘 79cm×35cm>

절부암의 사연을 품고 있는 바닷가. 지금은 해안도로가 포구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해안도로 안쪽 바닷물이 들어오는 영역이다. 갯바위들로 이뤄져 있던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으리만치 길 위주로 바뀌어버린 환경 속에서 아직도 그 때의 자취를 간직한 자연 암반을 그리려 하였다. 절부 고씨가 바다에 나가 행방불명된 남편을 목 놓아 부르며 다니던 그 바위려니 생각하면서. 저 바위엔 그녀의 발자국이 찍혀있을 것이라는 슬픈 상상이 그리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화면 구도는 파격적이다. 상단에 인간이 쌓은 돌 구조물과 오른쪽은 자연암반이 'ㄱ'자를 이루고 낮은 수심 속에 잠겨 있는 돌들이 그 날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남편이 죽었으리라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가겠다며 목을 맨 고씨부인. 3일장이 끝나는 날 그녀의 남편 시신이 이 바닷가로 찾아 돌아왔다. 혹시 저 갯바위는 아닐까? 절부암 앞 바닷물이 있는 곳이니 이런 과도한 상상 또한 필연.

어떤 슬픈 사연을 풍경 속에 그려내는 일은 오래된 흑백필름처럼 연필소묘로 그렸다. 흑과 백 그 사이에 발생되는 회색들의 명도를 가지고 차분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형상화 하였다. 근본적으로 바닷물과 돌이라는 물질적 만남을 화면 속에 구체화 한 것이다. 질감 표현을 통하여 어떤 감정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그 부부의 사랑이 얼마나 견고하였으면 그러한 결과로 후세에게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것일까. 저 바닷물은 오늘도 밀물과 썰물로 숨을 쉰다. 죽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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