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5)초저녁별 나오시니 (문태준)
입력 : 2023. 02. 07(화) 00:00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오늘은 세상이 날콩처럼 비려서

세상에 나가 말을 다 잃어버려서



돌아와 웅크려 누운 사내는

사다리처럼 훌쭉하게 야윈 사내는



빛을 얇게 덮고 일찍 잠들었네



초저녁별 나오시니

높고 맑은 다락집에서 기침하며 나오시니



물그릇 같은 밤과

절거덩절거덩하는 원광(圓光)

삽화=써머




세상살이에 말을 다 잃어버린 야윈 사내가 빛을 얇게 덮고 일찍 잠에 듭니다. 세속의 삶을 점묘하는 시인의 감각은 세상의 비린 날콩 냄새를 덮어둔 채 그 위에 원광이 섞인 물그릇 같은 고요한 밤을 내립니다. 훌쭉하게 야윈 사내가 일찍 잠든 밤은 높고 맑은 자리의 초저녁별이 이끌지만, 오늘 밤의 환대를 기억하는 것은 시인의 일이라서 말은 또 다음을 향해 갑니다. 밤을 '물그릇 같은 밤'으로 상기하는 일이 흔할 수는 없습니다. '웅크려 누운' 사람은 어제는 술에 취해 큰대자로 뻗은 사람일 수 있고, 물그릇이라면 목마른 사람 모두에게 필요할 것일 테지요. 그리하여 이 밤, 마음을 다해 그 사내가 되어 주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유일한 청자는 시인 자신이며 어쩌다 보니 그 사내는 곧 시인 자신이 돼버리는 것 아닐까요. 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웅크린 몸 위에 얇은 빛은 덮여야 하고 원광은 절거덩절거덩 부딪쳐야 합니다.

말문이 막히고 할 말을 잃어버린 단단한 생활 세계에 별 하나가 균열을 일으키며 찾아옵니다. 내 말이 어디에 있는지 비춰주는 것일까요. 오늘 밤에도 하늘엔 이름 없는 이들의 뭇별이 뜹니다. 그렇다 하여도 어머니, 나를 위해 촛불을 켜지 말고 부디 당신을 위해 남은 초를 다 사용해 주세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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