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병의 목요담론] 바다직박구리는 바다를 건너지 않았지만
입력 : 2023. 02. 02(목) 00:00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한라일보] 종달리 마을 안 정자에 세워져 있는 공덕비 위에서 바다직박구리 한 마리가 인사를 건넸다. 멋진 포즈를 취해 준 것도 고마운데, 연신 몸을 움직이며 더 가까이 오라 유혹한다. 덕분에 공덕비 내용을 살폈다. 마을번영을 위해 재정적 도움을 주신 재일교포들의 업적이었다.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가족애와 애향심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라 안에서는 중앙정부의 홀대와 육지 사람들의 냉대에 분노를 삼켜야 했고, 낯선 이국에서도 섬사람들의 디아스포라로 서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한 때 중앙정부는 제주 사람들에게 약 200년 동안 배를 타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출륙금지령(1629~1823)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1555년에 발생한 을묘왜란을 대승으로 이끈 제주도민에 대한 보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비굴한 정책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30년 만에 해상통로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뱃길은 제주 목사의 부임을 비롯하여 제주마와 공납품을 실어 나르는 유일한 해상교통이었다.

그야말로 제주도는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금지령이 해제되고 갑오개혁을 계기로 섬 바깥세상은 근대화 물결로 경제적 성장을 꾀하고 있을 때, 제주 사회는 암흑이었다. 세계1차 대전 이후,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산업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임금의 노동력이 급한 일본 기업의 구인 정책으로 조선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들어가게 되며, 그 중 제주인이 5만명이 넘었다. 이는 1930년대를 기준으로 제주도민 인구의 25% 정도인 셈이다. 제주항에서 목포 또는 부산을 거치던 항로 대신에, 제주-오사카 간에 정기 항로가 생긴 것이 결정적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려고 고향을 떠나야 했고, 특히 해녀들의 출타가 급증하였다. 군수산업과 방직공장을 비롯하여 가죽, 철공, 유리, 막노동 등 현지인들이 꺼리는 위험한 분야에서 종사하다보니,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당시 조직된 지역별 재일친목회는 타국에서의 울분을 달래고 단합된 마음을 다지기 위한 공동체였으며, 지금도 도내외의 향우회들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해방 이후 마을 곳곳에 들어선 도로, 전기, 수도, 전화, 마을회관, 학교 그리고 감귤 도입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근대화는 재일제주인 1세대와 재일교포들의 헌신적인 기부 활동에 의지하였으며, 향우회별 선의의 경쟁도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올해는 출륙금지령 해제 200주년 그리고 제주-오사카 간 군대환(君代丸) 직항로 개설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때마침 '제주 고향사랑기부제'가 닻을 올리고 항해하고 있다. 텃새인 바다직박구리는 바다를 건넌 적이 없지만, 누구보다도 고향의 보금자리를 걱정하고 있다. 또한 먼 바다에서 고향 번영에 기여하신 분들의 업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고향사랑기부제가 바다직박구리처럼 제주의 자연 가치와 제주다움을 간직하고,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문화유산운동으로 번져 나아가기를 기대해본다. <김완병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사·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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