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일의 승전 역사 을묘왜변 현장을 가다 2] (1)을묘왜변의 재조명과 역사적 의미 (하)
군·민 합심 승리… 조선·동아시아 평화 정착 기여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입력 : 2022. 08. 09(화) 00:00
제주시 제이각 남쪽에 설치된 을묘왜변 대첩을 기리는 벽화.
제주민 기개·용기가 최종적 승리로 귀결돼 큰 의미
처음 겪은 대규모 왜구 침입 극복 대첩으로 이끌어

임제(林悌)의 ‘남명소승’에도 별도포가 등장한다. 1578년(선조 11) 2월 기록에 의하면, 호남 원병(援兵)들이 매년 3월이면 별도포로 들어오고, 8월이면 조천포에서 떠난다고 돼 있다. 또한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1601.10.12)에 의하면 그가 제주의 방어시설을 점검하기 위해 제주 일주를 시작할 때 처음 들른 곳이 별도포였고, 전선과 여러 병기를 점검했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1601년 시점에는 화북포에 전선이 배치된 수전소가 이미 설치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해서 1653년(효종 4)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비로소 처음으로 화북포에 수전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북포수전소는 없었으며, 곧이어 1555년 제주 을묘왜변을 겪었다. 1578년 무렵이면 호남 원병이 화북포로 들어왔으며, 1601년에는 전선이 배치된 사실이 확인되고, 1653년 처음으로 화북포수전소의 설치가 확인된다. 이로 보아 화북포수전소의 설치는 아마도 제주 을묘왜변의 결과 화북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그 직후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화북진성의 축조는 그보다도 훨씬 뒤인 1678년(숙종 4) 윤창형(尹昌亨) 목사 때 창건됐다. 또한 1737년(영조 13)에는 김정 목사에 의해 대대적인 화북포 축항 공사가 이뤄졌다.

앞서 '명종실록'에는 왜선 40여 척이 제주 앞바다에서 1리가량 되는 곳에 닻을 내렸다고 기록했다. 1555년 당시 제주성 양안인 병문천과 산지천 하류에는 각각 벌랑포와 건입포 수전소가 설치돼 있었다. 그뿐 아니라 조천관에도 수전소가 있었기 때문에, 왜구는 아직 수전소가 설치되지 아니한 화북포를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판단한 듯하다.

제주시 오현교 위에 설치된 을묘왜변 전적지 표지석.
한편 제주 을묘왜변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직책이 정로위(김직손), 갑사(김성조, 이희준), 보인(문시봉), 정병(김몽근)으로 돼 있다. 이들 중 김직손은 당시 제주목사 김수문과 함께 내려온 군관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인은 모두 제주 출신으로 이해되며, 갑사와 정병 및 보인이었다. 이들은 신분상 지배계층보다는 일반 평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들의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이 결국 왜적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다했다. 다시 말해 제주의 군사와 민간이 합심해 전투에 참전했고, 제주 을묘왜변은 오히려 이들 군민(軍民)이 승리를 안겨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제주민의 기개와 용기가 뛰어나고 군사훈련이 상시 이뤄져 군사들 개개인의 능력이 우수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은 제주의 효용군과 치마돌격의 선제공격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사실 '명종실록'(1555년 5월 29일)에서도 전라도 영암성의 최후 승리를 거둔 요인으로 효용군의 선제공격을 들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당시 전라도 장수들이 두려워했고, 왜구들은 조금만 군사적 위엄을 보여도 도망해 숨기에 바빴다고 했다. 결국 사관(史官)은 "영암에서의 승전은 효용군 10여 명이 먼저 싸운 데서 얻어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은 효용군 및 치마돌격 등 제주 군민(軍民)들의 용기로 달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당시 역사를 기록하던 사관의 눈과도 일치하며,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이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1555년 5월 전라도에 큰 피해를 줬던 왜구들이 영암성 공략에 실패하며, 철수하다 제주로 눈을 돌려 6월 2차 공격을 해왔다. 1000여 명의 왜구가 제주를 침범했고, 제주성을 사이에 둔 대접전이 벌어졌으며, 이 전투에서 제주 군민은 대첩을 거두었다. 이 때문에 '명종실록'(1555년 7월 7일)에서는 '영암의 수성(守城)과 제주의 파적(破賊)'이라는 기록을 남겨 사실상 을묘왜변의 결과는 제주의 승전으로 종결됐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더욱이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은 김수문 목사라는 유능한 무관과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김몽근 등 군민(軍民)이 일심동체로 전투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이는 '명종실록'(1555년 8월 10일)에 왕이 "사졸(士卒)이 한마음이 돼 방비에 힘썼기 때문에 왜적을 물리쳤다"라고 말한 사실로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명종실록'(1555년 10월 12일)에는 을묘왜변 당시 제주의 상황이 비록 흉년으로 백성이 힘든 시절이었지만, "성안에 병기가 온전하게 잘 보존돼 있어서 성을 지킬 수 있었다"라는 제주선로사 윤의중(尹毅中)의 보고서를 남기고 있다. 이처럼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은 평상시 철저한 군비 관리와 관민의 일심동체로 이루어졌으며, 거기에 효용군 70인 및 4인의 치마돌격 등 강인한 용기가 수반돼 이룰 수 있었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1555년 을묘왜변에 대해 전라도 영암 지역은 성을 잘 지킴으로써 왜적을 물리쳤다면, 제주에서는 적을 격파해 승첩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다시 말해 을묘왜변은 전라도 남해안에서 발발해 최종적으로 제주에서 끝났으며, 마침내 제주의 승첩으로 귀결됐다. 을묘왜변은 특히 제주의 전황과 전과에 대해 그동안 학계와 일반 대중에게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제주성을 사이에 두고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고, 만약 제주성이 함락됐다면 조선의 지원군이 파견되기 전까지 왜구들에 의한 제주민의 피해는 엄청났을 터였다. 더군다나 일본과 한반도 및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 요충지 제주가 왜구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큰 지각변동을 초래할 사안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은 당대 조선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이루었다 볼 수 있다.

홍기표 전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
제주는 고려 후기 두 차례에 걸친 외부 세력의 침투와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었다. 1271년~1273년 삼별초의 입도와 여원연합군의 공격, 1372년~1374년 목호의 난과 최영(崔瑩)의 정벌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제주로서는 엄청난 전쟁의 참상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제주 섬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 이후 약 200년 동안 제주는 외세의 침략 없는 평화가 이어져 왔다. 물론 조선 초기에 산발적인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이들은 노략질을 일삼을 뿐 대규모 상륙과 전투를 벌인 것은 아니었다.

제주 을묘왜변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제주가 처음 겪은 대규모 외적의 침입이었고, 제주민은 이를 대첩으로 이끌어 시련을 극복했다. 이는 비단 제주만의 승리가 아니었고, 조선 을묘왜변의 최종적 승리로 귀결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 제주 을묘왜변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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