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물이야기-물의도시, 서귀포] (2)서귀포에 인공수로(상)
조선시대 서귀포인들은 왜 인공수로를 냈을까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입력 : 2022. 06. 13(월) 00:00
강점기 서귀읍 지적도에 배수로 확인
400여년 전 정방폭포 상류~서귀진성
약 1.2㎞ 구간에 인공수로 만들어 활용
수로 주변에선 논농사 등 사료 생생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제작된 한 장의 지적도. 일제 강점기 1914년에 제작된 구 서귀읍내의 지적도다. 관심을 끄는 것은 당시 우면(右面) 서귀리 지적원도에 나타난 구(溝)의 모습이다. 구는 도랑을 뜻한다. 배수로다.

이 지적도는 1590년, 지금의 자리에 서귀진 축성 때 동홍(정방)천 하류, 즉 정방폭포 원류의 물줄기를 서귀진까지 수로로 연결한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는 증거다.

이 지적도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배수로의 존재가 도면으로 확인된 것은 몇 해 전의 일이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고재원)이 수행한 도지정기념물 제55호 서귀진지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서다.

서귀포시 솔동산로 22번길(서귀동)에 위치한 서귀진지(址). 설명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1914년에 제작된 구 서귀읍내의 지적도로서 정방폭포 상류에서 서귀진지(빨간 부분)까지 약 1200m 구간에 만들어진 수로(溝, 파란색 부분)가 뚜렷하게 확인된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서귀진은 조선시대 제주 방어시설인 3성 9진 가운데 서귀포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던 유적이다. 원래는 목사 한승순(韓承舜)이 잦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코자 1439년(세종 21)에 천지연 상류 홍로천 위(현재의 서귀포시 1호광장 주변)에 성을 쌓았다. 이후 목사 이옥(李沃)이 1590년(선조 23)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 세웠다.

‘탐라지초본’(1842)을 보면, 정방연(正房淵)에서 이곳까지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들여 저장하였고, 남은 물은 주변에서 논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2011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수로와 우물 유구가 확인돼 2013년에 수리했다.

‘남천록’(1873)에 따르면, 서귀진은 성곽 규모가 둘레 233m, 높이 2.8m이고, 동서에 두 개의 성문과 객사, 무기고, 군관청, 창고 등 11동의 건물이 있었다. 또 ‘탐라순력도’(1702)의 서귀조점(西歸操點)에 당시 성곽 모습이 잘 나와 있다.

또다른 안내판에는 당시 서귀진은 성정군 68명, 목자와 보인 39명을 합해 약 100여명이 있었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전한다. 서귀진지 주변에는 천지연이 있는 연외천과 정방폭포의 동홍천이 자리하고 있고 해안과의 거리도 가까워 진성이 자리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서귀포항 주변 옛 서귀진성 위치(조사대상지로 쓰인 빨간 부분). 서귀진지 왼쪽 하천이 천지연폭포가 있는 연외천, 오른쪽 하천이 정방폭포로 이어지는 동홍천. 400여년 전에 정방폭포 상류에서 서귀진성까지 인공수로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성 밑 포구는 넓고 암벽으로 자연 방풍이 되어 있어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추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진(鎭)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았으므로, 폐목장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감세 조처하여 진 주위에 살도록 했다. 또 정방폭포의 상류 물을 끌어와서 식수와 농사에 이용하게 했다.

조선시대 서귀진을 방문했던 관료나 사대부들은 이곳에서 노인성을 보며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했다. 영주12경에도 '서진노성(西鎭老星)'이라고 해 서귀진에서 노인성을 바라보는 모습을 승경으로 꼽았다.

서귀포시는 서귀진지 복원을 위해 2002년부터 토지매입을 시작해 2009년까지 문화재구역 내 사유지 25필지 5832㎡를 모두 사들이고 서귀진지 유적 발굴조사에 나서게 된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이 실시한 서귀진지 발굴조사는 모두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2009년 12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6일까지, 2차 조사는 2010년 3월 31일부터 6월 26일까지, 그리고 3차 조사는 2012년 3월 12일부터 5월 31일까지 각각 실시됐다. 이때 정방폭포 상류에서 진성으로 물꼬를 냈던 배수로와 진성 내 집수정이 잇따라 확인됐다.

정방폭포 상류 정모시. 이곳 물을 끌어다 1.2㎞ 길이의 인공수로를 통해 서귀진지로 보냈으며 원도심 일대에는 논농사와 밭농사가 이뤄졌다. 현재 정모시는 여름철 피서 유원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강경민 사진작가
제주문화유산연구원이 서귀진성 관련 집수정에 대한 문헌을 정리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 문헌들에서 정방폭포 상류에서 서귀진성으로 물을 끌어다 쓰고 논밭에도 활용했던 기록이 전해진다.

‘남사록’(김상헌, 1669)='성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성 아래로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들였다.'

‘탐라지’(이원진, 1653)='正方淵의 상류를 동성(東城) 안으로 끌어들여 자그마한 나무로 만든 못(木池)을 만들어서 물을 저장한 다음 서성(西城) 밖으로 흘려 보낸다.'

‘남천록’(김성구, 1873)='동서의 두 문이 있는데 동쪽의 문에서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 당겨 서귀진사 안에 있는 마당 가운데 땅 속으로 스며서 흐르게 해서 남쪽 성 안으로 물을 끌어 대었다.'

‘탐라지초본’(이원조, 1842)='성 밖에는 논이 많은데, 정방연의 상류를 끌어다가 물을 대었으므로 옥토라고 불리었다. 동쪽 성에는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다가 우물을 만들었고, 나머지 갈래는 속에 둔 구멍으로 흘러 나가 성 남쪽의 밭에 물을 대었다. 당초에 설치할 때에는 의견이 매우 많았으나 농민들은 눈앞의 이익을 탐내어 다시 수로를 뚫었다. 성 안의 우물은 가뭄이 들면 마르므로 한탄스럽다.'

최종 발굴조사 보고서(2014)는 "근대 지적도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는데 동쪽으로 약 1㎞ 가량 이격된 동홍천에서 서귀진성까지 자연경사면을 이용해 수로를 연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 내로는 집수정으로 연결해 식수를 해결했으며, 이후 남쪽과 서쪽으로 연결해 농업용수로 이용한 것은 당시 발달한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밝혔다.

현재 서귀진지에는 집수정을 복원해낸 현장이 있다. 다음은 안내 설명문.

서귀진 집수정은 축성 당시 성에 주둔하는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수로는 정방폭포 상류에 있는 정모시(正毛淵)에서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 집수정까지 물을 끌어다 썼는데, 사용하다 남은 물은 성 서쪽 밖으로 내보내어 논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2010년 서귀진 2차 발굴조사 때 확인된 집수정은 바닥이 목조로 조립되어 있었고, 수로는 잡석을 쌓아 만들었다. 서귀포시는 2013년 서귀진 터를 정비하고 수로 일부를 수리하며 발굴조사 때 확인된 집수정을 그대로 남겨 두고 그 위에 83㎝ 두께의 흙을 덮고 나서 모형을 만들었다.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고재원 제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정방폭포 상류에서 서귀진성으로 물을 끌어다 사용했던 수로의 존재가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것이 발굴조사 과정에서 지적도의 도면으로 처음 확인된 것이다. 지적도에는 배수로(溝, 도랑)가 표기돼 있으며 중간중간 집수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불룩한 모양의 물통의 흔적이 보인다. 중요한 발굴 성과중의 하나다"고 했다. 지적도상에는 현재 소암기념관 주변 등 여러 곳에 물통의 흔적이 보인다. 서귀포 원도심 굽이굽이 구석구석 맑은 물이 흐르는 '물의 도시' 서귀포를 웅변하는 생생한 사료다.

<강시영 제주환경문화원장(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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