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34)해무 속에서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입력 : 2022. 05. 17(화) 00:00
해무 속의 메밀밭을 보고 싶어 이웃마을 와흘리에 갑니다. 그러면 거기 메밀들은 하반신이나 발목을 돌멩이들 속에 박고 너른 개활지를 따라 아무 불평 없이 서 있습니다. 돌무지뿐인 그 메마름 속에 숨 쉬는 연둣빛과 초록의 길을 해무 속에 흔들리는 메밀밭에서 느낍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틈새에서 인간을 기르는 초록의 음성을 듣습니다. 특별히 내 몸과 영혼에 초록이 소진될 때 내 슬픔을 이 메마른 대지에 핀 초록과 흰꽃들에 기댈 수 있습니다.

메밀밭 너머 물 없는 강이 산귤나무 언덕을 따라 구비돕니다. 마른강은 언어의 관능까지를 끌며 세상이 섬 밖에서 끌고 온 온갖 추한 폭력까지를 자신의 생명 속에 녹이며 지금 내 목구멍과 시야까지를 축여줍니다. 살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는 법도 없습니다. 그 마른강 계곡을 채우며 흐르는 해무가 어느 눈에 안 띄는 곳에 감추어둔 문장 몇 줄을 당신에게 읽어주고 싶습니다. 인간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사랑 아닌 것을 너무 많이 말하기 때문에 사랑이 보이지 않지요. 묵묵히 동네마다 생명을 돌리고 있는 마른강의 전언을 들어봐요. 그 위에 흐르는 해무는 이미지로만으로 세상을 먹이는 자유와 행복의 실재입니다. 해무의 돌밭에서,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메밀의 하얀 꽃의 그렁그렁한 눈물, 맑디맑은 물방울을 당신과 나눕니다.

불현듯 해를 가린 해무 속에서 마른강 근처에 지어놓은 산귤나무 고목, 그 공중누각을 만납니다. 자연의 섭리는 종종 인간이 구획할 수 있는 모든 관습적 개념들을 가로지르며 비상합니다. 이 경계지우기, 몸이 무거워진 짙은 구름이 수런거리다 이내 빗소리가 산귤나무를 흔들고 해무의 들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와흘리 땅은 채색의 화폭으로 번집니다. 그 피고 스러짐이 세상에서 찰나인 듯 신비롭습니다. 순간과 영원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비밀의 화원, 이토록 자유분방한, 이토록 물큰하고 쓸쓸한, 뜨겁고 쿵쾅거리는 심장의 울림으로 나를 감싸는 들판의 향연 속에 아득히 눈 감습니다. 이 기이한 아름다운 앞에서 '생명력'이라는 말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며 일렁입니다. 진정 이 땅은 지금 모든 삶을 잉태하고 낳는 삶의 자궁이라 할만합니다.

초록이 아름다운 것은 초록 속에 어둠과 사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 하나로, 잎눈 하나로 완전한 어둠을 숨 쉰 아기 하나가 응아 하며 어디선가 탄생을 알리고, 겨울을 난 메밀밭에 새잎 나고 꽃 필 때 그 아름다움은 초록을 꿈꾸어 온 어둠과 사막이 세상 밖으로 밀어낸 눈물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꿈꾼 만큼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말을 회의 없이 믿을 수 있는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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