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6)동네 술집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입력 : 2021. 10. 19(화) 00:00
단독주택 마당 탁자 하나
땅끝서 만나는 술의 의미
이야기 불꽃 꺼지지 않고


곧 출간될 책의 교정을 봐 출판사에 넘기고 어쨌든 한창때의 나이는 아니니 무엇이든 정성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해가 중천일 때 이근화 시인이 보내준 새 시집을 집어 들었다가 토마토 스튜로 저녁을 먹은 후 시집을 마저 읽고선 후다닥 안경을 벗어 던진다. 그만큼 요즘엔 시집 한 권을 한자리에서 통독하는 게 쉽지 않다. 시력, 정신 집중력, 체력이 예전만 못하니 엉덩이 붙이고 있는 게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이제 시가 좋아 단숨에 시집을 읽었다는 말은 빈말로도 할 수 없다.

스탠드 등을 끄고 잠시 머뭇대다 아내를 앞세우고 밤마실을 나간다. 집에서 가장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네 술집은 잠이 안 올 때 가는 곳이다. 제주 온 지 5년 된 부부가 단둘이 운영하는 단출한 가게이다. 마당에서 나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오늘은 바지락술찜이 안 되는데…" 라고 나를 힐끗 쳐다보며 안주인이 말한다. 내가 반드시 바지락술찜을 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귀띔을 해주는 것이다. 어제 날씨가 궂어 장을 다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층 단독주택 마당에 차린 작은 술집. 테이블은 한 개뿐이고, 주방과 붙은 긴 스탠드에 사람이 대여섯 명 앉을 수 있는 규모이다. 그 때문에 주인 양반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물이 끓는 소리, 계란 부치는 소리, 그릇 씻는 소리가 손님들의 술자리를 맴돈다. 본래는 심야주점이었는데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영업시간의 이점(利點)은 없어졌다. 나는 잠 안 오는 밤에 아내와 오거나 아내가 잠든 시간에 혼자 빠져나와 이 집을 종종 찾아오곤 했다. 술맛이 있다. 밥이 맛있다, 고 하면 식당에 대한 칭찬이듯 술이 맛있다고 하면 술집에 대한 칭찬이다.

음식 맛이 은근해 어떤 반찬에도 손이 가는, 몇 년 전만 해도 마을 주민이 아니고선 모를 정도로 숨은 식당이었다. 지금은 제법 성업 중이다. 관광객들은 제주가 반도의 남단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최남단에 와서 술을 먹는 거다."라는 말을 하며 건배를 한다. 그분들이 남쪽 끝에 다다라 술을 먹는 게 맞지만, 인간은 현실 속에서 언제나 땅끝에 내몰리며 땅끝이라는 장애물과 싸우기 십상이다. 사실 술은 그래서 먹고 그래서 맛도 있는 것이다.

지난겨울 어느 밤엔 폭설을 뚫고 왔더니 큰눈이 내리는데 와주어 고맙다고 고급 사케 한잔을 서비스로 주기도 했다. 나는 원하는 안주가 없으면 다른 건 잘 안 시키는 타입이어서 생맥주를 기울이고 있으니 흰 머리 희끗희끗하고 말수 적은 바깥양반이 요리하던 손을 뻗어 슬쩍 구운 은행알 몇 개를 내 술잔 옆에 놓아준다. 이야기라는 작은 불꽃이 꺼지지 않는 서늘한 가을밤에, 반딧불이가 술집 마당까지 내려와 날아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만나서 고맙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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