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너무 많은 목소리
입력 : 2026. 10. 14(수)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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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문화는 듣는 행위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영혼을 얻는다.

- 비나 다스, 'Voice as Birth of Culture'

인도 인류학자 비나 다스는 폭력이 일상에 스며들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 과정을 오랫동안 추적해 온 학자다. 그녀에게 목소리는 개인의 절박한 말이 공동체의 규칙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누군가 그 목소리가 가리키는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규칙은 이전의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다스는 리트윅 가탁의 영화 '구름에 가린 별'에서 한 장면을 주목한다. 가족의 생계를 홀로 짊어지다 병든 맏딸이 오빠에게 "오빠, 나는 살고 싶었어"라고 말한다. 체념에 가까운 이 고백은 곧 "오빠, 나는 살 거야"라는 울부짖음으로 번진다. 오빠가 화면에서 사라지자 카메라는 산과 하늘, 나무가 펼쳐진 풍경으로 물러난다. 자연은 인간의 고통에 무심한 듯 보이지만, 가탁은 그 외침을 끝까지 소리로 남긴다. 다스가 이 장면에서 던지는 질문은 간결하지만 무겁다. 이 목소리를 누가 듣는가.

철학자 스탠리 카벨은 다스의 작업을 두고, 한 사회의 고통을 살피는 일은 곧 그 사회가 누구의 고통을 외면해 왔는지 묻는 일이라고 논평한다. 사회는 제 얼굴을 지키려고 스스로 낸 상처의 일부를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 둔다. 상처가 깊이 묻힐수록 사회가 진실이라 부르는 것과 누군가 실제로 겪은 일 사이의 간극이 생긴다.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진실은 웅변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아름답지도 힘차지도 않은, 귀 기울이는 이가 없으면 소리 없이 사라질 목소리로 온다.

최근 한 편의 역사 소재 영화가 1970년대를 다시 불러냈다. 신문 광고면이 백지로 나가던 시절,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국가가 정하던 시절이다. 영화는 1974년 여름의 사건과 그해 가을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함께 겹쳐 놓는다. 영화가 내놓은 가설은 곧 극장 밖으로 번졌고, 영화 한 편은 저마다의 기억과 판단을 쏟아내는 말의 광장이 됐다.

광장의 풍경은 역설적이다. 정치인의 기자회견, 배우 집 앞의 집회, 평점란의 욕설이 이어지는 사이 영화제 일정과 무대인사가 멈춰 섰다. 검열의 시대를 되묻는 영화 곁에서 또 하나의 침묵이 생겨난 것이다. 이번에는 명령하는 국가 대신 넘치는 '말'이 그 침묵을 빚었다.

침묵과 소음은 반대편에 선 듯 보이지만 닿는 곳은 같을지 모른다. 침묵은 말할 기회를 막고, 소음은 이미 나온 말마저 들리지 않게 한다. 반세기 전 우리가 들을 수 없었던 것과 지금 우리가 듣지 않는 것은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듯하다.

영화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동안 놓친 물음은 어쩌면 어떤 목소리가 공적인 말로 받아들여졌고, 어떤 고통이 진영의 구호 속으로 흩어졌는가 하는 데 있다. 가탁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물을 떠나도 목소리는 화면 밖에 오래 남는다. 우리의 화면은 그 반대다. 목소리로 가득 찬 화면 한구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는 조용히 지워지고 있을지 모른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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