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강영란의 '귤밭을 건너온 사계'
설레는 주황… 열두 달 농사 일기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입력 : 2020. 08. 21(금) 00:00
푸른 별빛 아래 감귤이 익어가고 있다. 강수진 작가가 그린 산문집 삽화 중 하나다.
귤밭 일군 아버지의 기억
1~12월 귤나무 한해살이

귤에 기대사는 영농 풍경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1리의 어느 귤밭. 그곳에 시인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귤나무를 가장 먼저 심었다. 귤이 처음 열리던 해부터 과수원 안에 작은 돌움막을 짓고 열매를 지켰다. 시인은 그때를 "손톱으로 긁으면 가난이 긁혀 나올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귤밭을 일군 아버지는 지금 시인의 곁에 없다. 아버지는 귤 농사로 얼었던 손에 상처와 흉터를 지닌 채 먼 길을 떠났다.

제주 강영란 시인의 '귤밭을 건너온 사계'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이 생애 꼭 해야 할 숙제'처럼 쓰여졌다. 1998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로 시집 '소가 혀로 풀을 감아 올릴 때' 등을 냈고 서귀포문학상을 수상했던 그가 처음 묶은 산문집이다.

산문집은 1월에서 12월까지 귤나무의 한해살이를 풀어내고 있다. 영농계획을 세우는 1월, 간벌작업에 나서는 2월을 지나 3월의 늦서리 피해, 4월 새순과 귤꽃 솎기, 5월에 퍼지는 향수같은 귤꽃향, 6월의 생리 낙과, 7월 열매솎기와 귤굴나방, 8월 가문 날의 귤밭, 9월 태풍치는 밭, 10월 극조생온주와 11월 조생온주 수확, 12월 과실 저장 등에 얽힌 이야기로 이어진다. 일년 열두 달, 사시사철 귤밭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검은 흙에서 갈색 가지와 초록 잎이 자라고 주황빛 과실이 맺혀가는 과정은 굴곡진 생을 닮았다. 시인은 한 해의 마지막 12월에 '주홍의 심장'이 누구에게 갈까라며 설렌다.

귤에 기대어 산다는 그의 글은 시적인 문장으로 채워졌다. '간벌'에서는 '그대와 나 사이 간격이 촘촘해지면/ 까닭 없이 예민해지고/ 서러워지는 것// 그러니 아파도 잘라내는 것/ 당신의 공간을 인정하려/ 나를 베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말미엔 귤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담았다. 귤나무 역사, '탐라순력도' 속의 제주 귤, 온주밀감의 효시, 귤밭 무덤, 귤나무 민간요법 등을 실었다. 사이사이 강수진 작가가 제주 풍광과 귤 농사의 순간들을 서정적 삽화로 그려냈다. 시인동네. 1만3000원.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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