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문순자 시집 '어쩌다 맑음'
노동하는 여자들에게 봄볕 들기를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입력 : 2020. 05. 22(금) 00:00
문순자 시인은 신작 시집 '어쩌다 맑음'에서 노동하는 여자들의 시선으로 시편을 펼치고 있다.
시적 화자 농부의 시선
다시 심은 감귤나무들

쇠죽은못 설화 생명력

지난해 노산시조문학상을 받은 제주 문순자 시인의 새 시집 '어쩌다 맑음'엔 '농사일을 하는 여자'가 있다. 농부(農夫)가 아니라 농부(農婦)다.

시인은 이 계절을 감귤밭에서 알아챈다. 그에게 5월은 돌담에 기대 피어난 붉은 장미에 앞서 향기 날리는 하이얀 감귤꽃으로 먼저 온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는 흙을 일구고 감귤나무 키우며 살아가는 일상이 흩어져 있다.

'봄이면 버릇처럼 전정가윌 만진다/ 감귤나무 생목숨 다비한 지 10년 만에/ 아들놈 첫 월급 털어/ 감귤나무 또 심는다'는 '다시, 쓰다'에서 시적 화자는 일수 찍듯 밭으로 나선다. 농부는 그것도 모르는 땅이 야속하다. 죽어라 김을 매도 돌아서면 이내 무성해지니 말이다.

참깨, 기장, 양배추 별별 농사 다해봤다는 시 속의 농부는 몸으로 영농일기를 쓰면서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를 배운다. 폐원한 감귤밭에 새로 뿌리내린 감귤나무의 첫 꽃봉오리를 따는 농부는 '차마 저들에게 어찌 열매를 바라랴'며 기다림을 노래한다. 감귤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첫 수확하는 감귤밭에 야멸차게 몰아치는 링링, 타파, 미탁, 하기비스 같은 태풍에는 '어린 것,/ 그만 흔들고/ 차라리 내 빰을 쳐라'('내 뺨을 쳐라')고 목청을 돋운다.

시인은 감귤나무에 더해 꽃기린, 괭이밥, 각시투구꽃, 왕관무릇, 개구리발톱꽃, 흰 접시꽃 등 자연물을 시제로 택해 세태를 읽고 있다. 동백꽃 한 송이 없는 곳이 싫어('첫차') 밤새 뒤척인 화자는 소원 들어주는 제주 밖 어느 사찰에 올라서도 동백('향일암 동백')을 찾는다.

제주섬에선 농부들이 밭일만 하진 않는다. 물질하는 틈틈이 농사짓는 이도 있다. 시에 흩어진 농부의 시선이 바다밭으로 향하는 건 시인이 제주 설화를 빌어와 쓴 '쇠죽은못'처럼 노동해온 제주 여자들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표제시 '어쩌다 맑음'의 어머니도 그런 생을 건너왔다. 시인은 그들의 남은 나날이 꿈을 꾸듯 환해지길 바란다. 황금알.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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