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논단]잃어버린 탐라, 잊어버린 역사
입력 : 2011. 05. 05(목)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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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 역사문화 바로 알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인재개발원에서 '제주역사 이야기'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고, 관련 교육을 전 도민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고대왕국 탐라의 진취적인 역사를 재인식함으로써 변방·고립·단절의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고 국제자유도시·특별자치도 추진의 정신적 바탕을 단단하게 하려는 취지로 보인다.
1995년 민선 도정 출범 이후 추진되었던 '제주사정립사업' 또한 비슷한 목적 지향점을 갖고 있었기에 새삼스런 일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2001년 국제자유도시, 2006년 특별자치도의 출범은 제주도민의 정신세계를 재인식하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더욱이 800만 가까운 관광객 시대를 맞이하여 제주도민 스스로 독특한 제주문화의 기본상식을 몸소 터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 속에 살고 있다.
탐라(耽羅)는 2천 년 전에 제주섬에 건설된 고대 문명국가였다. 아놀드 토인비가 지적한대로 인류 문명사에서 유산(流産)되고 생후 자라지 못해 죽어버린 문명에 비하면, 탐라는 번영에 성공한 문명국이었다. 지배층의 성립, 해민(海民)들의 교역을 통한 국부(國富) 창출, 신라를 위협할 정도의 해상 대외 진출 등 탐라는 천년 사직을 유지한 해상왕국이었다. 고구려·백제가 일찍 멸망해도 탐라는 존속했다는 기본 사실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105년 고려왕조에 탐라가 병합되었어도 지배층의 자치 방식과 서민들의 기층문화에는 변함이 없었다. 탐라왕국을 복원하려는 양수(良守)의 난(1168), 삼별초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하는 태도, 몽골 지배 때 탐라로 복귀 사실 등은 탐라민들의 일관된 태도였다.
이에 반해 조선왕조는 철저하게 탐라를 내지(內地)로 종속시킨 중앙권력이었다. 조선초기 성주청·왕성·칠성단의 훼철, 탐라 지배층 성주·왕자직의 폐지(1402), 출륙금지령 포고(1629), 탐라호국당인 광양당의 혁파(1703) 등은 탐라의 정신적 유산을 소멸시키려는 강력한 중앙 지배력의 방침이었다.
1천 년 이어진 탐라가 멸망한 지 9백 년이 지났다. 중앙집권과 유교문화를 국가의 모토로 내건 조선왕조 시대를 거치며 제주사람들은 '탐라'를 서서히 잊어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격동기를 거쳐 물질 산업화의 세례를 받으며 '탐라'는 우리에게서 더욱 멀어져갔다.
1990년대 본격 개시된 지방자치시대는 멀어져간 탐라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중앙주도적 제주도 개발과 IMF 위기상황을 겪으며 제주도는 기존 중앙의 국가체제에 안주해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발로가 특별자치 지향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구(琉球)왕국의 전통을 바탕으로 미래 성장동력을 키워가는 오키나와, 잉글랜드에 통합되었어도 역사와 언어·문화를 자랑스럽게 유지해나가는 웨일즈. 모두 섬나라 탐라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현재와 미래는 제주도를 앞질러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21세기 제주 주민공동체에 주어진 특별자치의 지향은 기회이기보다는 위기에 가깝다. 중앙에 의존해오던 기존 관행을 깨부수고 스스로 계발하고 자립할 수 있는 자율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고립을 면치 못하는 더 큰 위기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공동체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그들 스스로를 결속시키고 집단적인 자신감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지방정치의 활로가 될 수 있다. 탐라 역사의 본질을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아젠다와 결부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박찬식 역사학자>
탐라(耽羅)는 2천 년 전에 제주섬에 건설된 고대 문명국가였다. 아놀드 토인비가 지적한대로 인류 문명사에서 유산(流産)되고 생후 자라지 못해 죽어버린 문명에 비하면, 탐라는 번영에 성공한 문명국이었다. 지배층의 성립, 해민(海民)들의 교역을 통한 국부(國富) 창출, 신라를 위협할 정도의 해상 대외 진출 등 탐라는 천년 사직을 유지한 해상왕국이었다. 고구려·백제가 일찍 멸망해도 탐라는 존속했다는 기본 사실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105년 고려왕조에 탐라가 병합되었어도 지배층의 자치 방식과 서민들의 기층문화에는 변함이 없었다. 탐라왕국을 복원하려는 양수(良守)의 난(1168), 삼별초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하는 태도, 몽골 지배 때 탐라로 복귀 사실 등은 탐라민들의 일관된 태도였다.
이에 반해 조선왕조는 철저하게 탐라를 내지(內地)로 종속시킨 중앙권력이었다. 조선초기 성주청·왕성·칠성단의 훼철, 탐라 지배층 성주·왕자직의 폐지(1402), 출륙금지령 포고(1629), 탐라호국당인 광양당의 혁파(1703) 등은 탐라의 정신적 유산을 소멸시키려는 강력한 중앙 지배력의 방침이었다.
1천 년 이어진 탐라가 멸망한 지 9백 년이 지났다. 중앙집권과 유교문화를 국가의 모토로 내건 조선왕조 시대를 거치며 제주사람들은 '탐라'를 서서히 잊어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격동기를 거쳐 물질 산업화의 세례를 받으며 '탐라'는 우리에게서 더욱 멀어져갔다.
1990년대 본격 개시된 지방자치시대는 멀어져간 탐라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중앙주도적 제주도 개발과 IMF 위기상황을 겪으며 제주도는 기존 중앙의 국가체제에 안주해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발로가 특별자치 지향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구(琉球)왕국의 전통을 바탕으로 미래 성장동력을 키워가는 오키나와, 잉글랜드에 통합되었어도 역사와 언어·문화를 자랑스럽게 유지해나가는 웨일즈. 모두 섬나라 탐라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현재와 미래는 제주도를 앞질러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21세기 제주 주민공동체에 주어진 특별자치의 지향은 기회이기보다는 위기에 가깝다. 중앙에 의존해오던 기존 관행을 깨부수고 스스로 계발하고 자립할 수 있는 자율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고립을 면치 못하는 더 큰 위기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공동체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그들 스스로를 결속시키고 집단적인 자신감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지방정치의 활로가 될 수 있다. 탐라 역사의 본질을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아젠다와 결부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박찬식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