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남아있는 날들
입력 : 2024. 01. 05(금) 00:00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한라일보] 죽음을 생각하면 몸서리쳐지던 날들도 있었다. 너무 멀고 두려운 일이라 생각해서 였을까. 남의 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렇게 자연스레 죽음에 가까워 지면서 그 감각은 많이 변했다. 여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나로부터 아주 멀다고 느끼진 않는다. 오히려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어쩐지 알 것 같은 누군가의 모습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를 비롯한 주변에서는 십 수년 전부터 조부모님 상을 치른다는 부고 소식이 들려온데 이어 얼마 전 부터는 부모님 상을 치른다는 부고 소식에 아프지만 익숙해졌고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지인들의 부고 소식도 종종 들려온다. 지난 해를 떠나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시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더 골몰히 하게 되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는 노랫말이나 '몇 번이나 보름달을 더 볼 수 있을까'라는 책 제목처럼 남아있는 날들이라는 것의 의미를 차분히 헤아려 보기도 했다.

2023년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는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의 '리빙: 어떤 인생'이었다. 죽음이라는 이별을 앞둔 한 노인의 마지막 시간들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덤덤한 영국의 노신사 윌리엄스의 단조롭게 통제된 일상에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이라는 손님은 반갑지 않지만 물러날 기색이 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차를 타고 직장과 집을 오가던 런던 시청의 공무원 윌리엄스의 일상은 이 손님의 방문에 크게 흔들린다. 변수가 없는 삶을 살았던 이에게 경우의 수는 급조되기 마련. 윌리엄스는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일들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채워간다. 일상에 균열을 낸 일탈은 그에게 낯선 감각을 일깨워 기쁨을 주기도 하고 허무한 감정의 연기에 휩싸이게도 만든다. 알던 이의 낯선 모습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기도 하고 몰랐던 삶의 조각들을 맞춰가며 남은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중구난방으로 작별 인사를 써 내려가던 윌리엄스는 마침내 마지막 문장을 찾게 되고 공들여 눌러쓴 그의 마지막 문장은 그가 떠난 세상에서 잊히지 않고 울려 퍼지게 된다.

남아있는 것들이 주는 아쉬움은 언제나 있다. 가득 찬 채로 건네진 것들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느끼는 쓸쓸함은 도무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인간의 삶이란 많은 것들을 몰랐던 시절부터 모든 것을 알게 된 것 같은 시간까지를 경험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채우고 또 스스로를 비워가면서 우리는 나의 적정 분량을 알아간다. 그렇게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일인 분의 삶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런데 때로는 영화 속 윌리엄스처럼 혼자의 세상을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 가능해 지기도 한다. 내가 빚어낸 소중한 삶의 조각들이 타인이라는 접점과 만날 때, 반짝하고 세상이 빛나는 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리빙: 어떤 인생'은 보여준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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