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구멍숭숭 돌담 사이 푸른 빛 보이시나요
4·3다룬 임철우 소설 '돌담에 속삭이는'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입력 : 2019. 07. 05(금) 00:00
한은 탄생과 동시에 아비의 수의를 물려받았다. 연좌제였다. 대학 졸업 후 사립학교 교사가 되고 가정을 꾸렸지만 한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비의 죄를 대신 치러야 했다. 그가 퇴직한 뒤 향한 곳은 제주섬. 4·3 60주년이 되는 해에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 지면을 통해 드러난 제주는 한이 평소 알던 곳이 아니었다. "육지와 이 섬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위치한 별개의 행성 같았다."

임철우의 신작 소설 '돌담에 속삭이는'은 한이 제주섬에서 겪은 이야기다. 제주로 거처를 옮긴 임 작가의 분신인 양 주인공 한은 소설 속 1948년 월산리 학살사건을 통해 4·3이 이 섬에 드리운 크나큰 슬픔과 마주한다.

"안 돼. 보지마. 너 같은 아이들은 저런 끔찍한 모습을 봐선 안돼. 아아, 사람이, 사람한데, 사람이, 사람을……. 얘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봐선 안 돼. 너무 많은 죽음을 본 사람은 장차 세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어. 사람들 속에서, 온전한 한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가 없게 돼."

한 앞에 환영으로 나타나는 일곱살 몽희. 아이의 엄마는 이 섬에서 벌어진 참극 앞에서 실성한 듯 삼남매를 껴안고 흐느낀다. "죽는다, 죽었다, 죽인다, 죽였다"가 아니라 "그냥 꽃송이가 되어 땅에 툭 하고 떨어진 거"라고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엄마의 말처럼 몽희 삼남매는 끝내 꽃이 되어 떨어진다.

소설은 몽희네 가족의 사연을 좇으며 제주신화 속 서천꽃밭섬으로 이끈다. 열다섯 살을 넘기기 이전에 죽은 아이들이 간다고 믿는 낙원 같은 서천꽃밭에서 어린 영혼들이 고이 잠들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읽힌다.

60년 전 동백처럼 스러진 아이와 지금 이곳을 살고 있는 한을 연결하는 건 돌담이다. 몽희는 한이 사는 집 돌담 사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신호하며 아직 이 섬을 떠나지 못했다고 알린다. "남다르게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한이었기에 그 존재를 알아봤다. 공감과 연대는 이 땅의 눈물을 멈추게 할 마지막 힘일지 모른다. "그 섬엔 별보다도 많은 어린아이들의 슬픈 혼이 돌담 틈에 숨어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 섬에 가거든, 부디 돌멩이 한 개도 무심히 밟고 지나지 말라." 현대문학. 1만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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