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고도를 기다리며
작성 : 2025년 06월 05일(목) 02:00
[한라일보] 지난해 12월 3일 그날 밤 10시가 지나 대통령은 비서관의 시중을 받으며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대통령으로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라고 첫말을 꺼냈다. 야당의 폭거와 입법독재를 하나하나 열거한 그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민의 안전을 위한다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의 목적은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된 국회의 해산과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의 척결이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다.

존경하는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계엄령 선포는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부조리극의 시작이었다. 부조리(不條理)는 말 그대로 이치에 맞지 않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철학이나 문학에서 인간 존재와 세계의 모순, 무의미함, 이해 불가능한 현실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뇌리를 스친 문학작품이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의미한 대화 속에 숨어 있는 깊은 통찰력 때문이다.

계엄령의 밤 이후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다시 만난 세상'을 열창했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 윤석열의 구속과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는 부하들을 감옥에 남겨 놓은 채 홀로 소위 사법 탈옥에 성공한다. 기득권 카르텔의 공고함을 보여준 사례는 이뿐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불안과 기다림에 지쳐갔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의 행동거지는 극 중의 등장인물 '포조'를 닮았다. 급기야 내란 불면증을 호소하는 '럭키'들이 생겨났다.

'럭키'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등장인물로 이름만큼은 '운 좋은 자'를 의미하지만, 극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인물이다. 그는 포조라는 주인에게 끌려다니며 심한 학대를 받는다. 개처럼 목줄에 묶여 있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권력에 어떻게 지배당하고 도구화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포조는 1막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장황한 말로 자신의 위대함을 떠벌린다. 그는 허세와 자기기만에 빠진 권력자로, 포악하고 의미 없는 것에 집착하는 인물로 풍자되고 있다. 그런데 2막의 포조는 맹인이 돼 럭키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돼 나타난다. 지배자가 피지배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들이 기다리는 '고도(Godot)'는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기대와 희망, 구원에 대한 상징이다. '고도'는 소년을 통해 "내일 오겠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느닷없이 맞닥뜨린 부조리극은 이제 1막이 끝났다. 6개월간 벌어진 이 나라 적폐의 속살을 다 보았다. 새로 뽑힌 대통령은 우리가 기다린 그 '고도'의 화신(化身)일까? 제2막을 관람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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