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만의 특별기고]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따라 걷는 길
-교사와 교육공동체의 소진과 회복을 위한 성찰
작성 : 2025년 05월 29일(목) 14:45
[한라일보] 제주의 한 교사가 또다시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교육계는 물론 지역 사회 전체가 깊은 침묵에 잠겼습니다. 누군가는 그 소식을 듣고 입을 다물었고, 누군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추모의 물결은 단지 한 사람의 부재를 넘어, 교육 공동체 전체의 고통과 상처를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 되었습니다.
학교는 단순한 배움의 공간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고, 삶을 실험하며, 인간으로 자라나는 '작은 생의 숲'입니다. 그 숲을 돌보는 이가 교사입니다. 교사는 늘 서서, 늘 듣고, 늘 앞서 가야 합니다. 누군가 넘어지기 전에 먼저 넘어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가장 먼저 지치고, 가장 깊게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소진은 마음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입니다.
"너무 오래 무거운 것을 들고 있었어." 그 신호를 무시하면 몸과 마음은 가랑잎처럼 부서집니다. 어떤 날은 눈물이 이유 없이 흐르고, 어떤 날은 자신이 투명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이들의 사소한 질문에 목소리가 떨리고, 부모의 기대 섞인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사들은 묵묵히 자신의 감정을 감춥니다. "나는 괜찮다"는 말 뒤에 너무 많은 것이 눌려 있습니다.
저는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학교의 중심은 '마음 건강'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품었습니다. 그 마음을 돌보기 위해 교장실 앞에 '마음지원실'이라는 작은 팻말을 붙였습니다.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 중에는 말없이 앉아 한참을 눈물만 흘리는 분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말합니다. "이곳은 무너지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꼭 필요한 공간이기도 하지요."
심리학에는 '공감 피로(Empathic Fatigu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이 지나치면, 자신의 감정은 탈진하고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교사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을 조율합니다. 아이들의 눈을 읽고, 학부모의 말 사이의 기대를 파악하며, 동료 교사와의 관계 안에서 균형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들여다보지 못한 채 눌러둡니다. 그래서 교사들에게는 '비워낼 공간'이, '받아줄 사람'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우리학교는 다양한 마음 돌봄 프로그램을 만들어왔습니다. 싱잉볼의 잔잔한 울림 속에서 긴장을 내려놓고, 문화체험 연수로 일상에서 벗어나 재충전하며, 전문상담가와의 만남 속에서 묵은 감정을 언어로 풀어냅니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회복은 '관계 안에서의 치유'였습니다.
치유란 고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자리를 다시 의미로 채우는 일입니다.
마치 폭풍을 견딘 나무가 더 단단한 나이테를 가지듯이, 우리는 상처를 통해 성장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 나만 아플까?"에서 "이 아픔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로.
교사는 존재 전체로 아이와 마주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이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함께 살아내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가 흔들릴 때, 교실의 공기마저 무거워집니다. 아이들은 말 없이 그 변화를 느끼고, 따라 웃거나 함께 움츠러듭니다. 그래서 교사의 회복은 곧 아이들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회복은 교사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이제 학부모와 사회가 나서야 합니다.
학부모는 '완벽한 학교'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학교'를 지지해야 합니다. 아이가 실수했을 때, 그 실수를 책임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함께 기다려야 합니다. 교사를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동행자'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는 교육을 단순한 결과 중심의 경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는 미래 사회의 거울입니다. 그 거울이 뒤틀리면, 결국 그 사회도 왜곡된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사를 응원하는 사회인가?"?
"우리는 아이의 실패를 성장의 일부로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함께 울고 웃는 공동체인가?"
심리적 예방과 회복의 첫걸음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는 태도'입니다. 자기연민(self-compassion)은 그 출발점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했구나"라고 자신에게 말해주세요. 그 말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장 다정한 약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게 됩니다.
그 길 끝에서, 어느 날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가 살아낸 이 시간들은 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나를 빚은 시간이었구나."
제주어로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삶의 통찰입니다.
오늘은, 부디 자기 자신에게 다정한 한 문장을 건네보세요.
"지금도 잘 살아내고 있어. 그게 바로 나야."
그리고 그 말을 믿어주세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걸어가는 동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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