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호루몽] 절망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
작성 : 2025년 05월 12일(월) 02:30

영화 '호루몽'

[한라일보] 누군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드물게 그 한 문장만으로도 분명해지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한다. 신숙옥, 그는 쉬운 절망 대신 어려운 희망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 신숙옥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호루몽'이 26회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가 되었다. 동시대의 새로움을 발굴하고자 2014년 출항한 전주국제영화제의 제작 프로젝트인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선정작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자이니치(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이르는 말로 차별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3세인 신숙옥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신숙옥은 지난 2017년 DHC 방송국과의 법적 다툼을 통해 화제가 된 사회운동가로 영화 '호루몽'은 신숙옥으로부터 시작해 그의 어머니인 케이코, 외할머니인 이백란까지 3대에 걸친 재일 한국인 여성 서사를 격정과 고요를 교차하며 담아낸다. 전작인 '울보 권투부', '카운터스', '모어' 등을 통해 개성 강한 캐릭터들의 안과 밖을 두루 살피는 힘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선보여 온 이일하 감독은 이 신작의 제목을 '호루몽'으로 선택했다. '호루몽'은 '버리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진 일본어로 고기의 부속 부위인 곱창/대창 등을 지칭하며 이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했던 시절 살아 남기 위해 버려진 부위를 먹으며 생명력과 정체성을 지켜온 자이니치 코리안들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호루몽'은 '싸우지 않으면 다음이 없다'라는 단호한 삶의 태도로 나를 둘러싼 세상의 벽에 온몸으로 균열을 만들어 내고 소외된 이들 사이의 틈에 자신의 삶을 넣어 채워온 사람 신숙옥의 인생과 더없이 어울리는 제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고 살아 있기에 응당 삶에 치열했으며 외로웠기에 함께를 그릴 수 있었던 사람 신숙옥, 어떤 측면에서 영화 '호루몽'은 예상치 못했던 히어로 장르물이기도 했다. 혐오의 우박 앞에서도 눈 감지 않는 자, 고통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이동시키는 이, 한숨 대신 온화한 미소로 비관의 진창 위해 승리의 깃발을 꽂는 손을 목격하는 일을 히어로 장르에서가 아니라면 과연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호루몽'의 히어로가 싸우는 적은 우주에서 날아온 괴물이 아니라 유독함의 임계점을 넘어버린 뿌리 깊은 혐오와 차별의 공기다.

차별과 혐오는 집요하게 진행된다.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고 가속도로 구르며 누군가를 덮친다. DHC 방송은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신숙옥을 향한 '차별과 혐오로 뭉쳐진 가짜 뉴스'를 버젓이 내보낸 바 있다. 이는 극우 방송의 부주의함을 넘어선 테러에 가까운 일이었고 신숙옥은 거대 방송국과의 재판을 시작한다. 그는 이 모든 전투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물러섬 없이 맞선다. 이것은 비단 그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건이 대단한 범죄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싸운다. 공감과 연대의 힘이 신숙옥의 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가 지난한 싸움을 하는 다른 이들을 위한 깃발로 흔들린다. 영화는 그 선명한 움직임을 따라가며 관객 또한 원색적인 혐오의 틈새에서도 찬란하게 고유의 빛깔로 펄럭이는 희망을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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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몽'은 신숙옥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성장과 변화를 빼곡히 담아낸다. 삶의 변곡점마다 부딪힘을 통해 길을 내왔던 그의. 삶은 그의 어머니 케이코 그의 할머니 이백란의 삶과 교차점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고통과 인내의 시대를 살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한 서린 고백을 담는 대신 울분을 삼킨 뒤 토하듯 뱉어낸 분명한 문장들을 체록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 내 심장이 느낀 박동을 감지하고 그 심장이 하는 말을 경청한 이는 즉각 몸의 움직임으로 공허한 말들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호루몽'은 인물의 행보를 채 담아내지 못한 지도와 역사의 빈틈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틈을 부지런히 채운 깊게 패인 발자욱의 흔적들로 새로운 질문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초대장이다. 말 그대로 보법이 다른 인물을 만났다. 그가 기필코 선택하지 않았던 절망 덕에 좌표는 희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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