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진다"… 선흘 그림할망들이 '애순'에 전하는 위로
예술공간 된 옛 농협창고
레지던시 선흘그림작업장
'폭싹 속았수다' 주제 전시
9명 할머니 참여해 작업
"그리면 해 가는 줄 몰라"
작성 : 2025년 05월 11일(일) 16:19

지난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에 있는 \'선흘그림작업장\'의 모습. 별칭이 붙여진 할머니들의 작업공간이 그림으로 알록달록하다. 박소정기자

[한라일보] "애순아, 울지마라. 복이 돌아와 다시 살아진다."

그림을 그리는 고순자(87) 할머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 '애순'에게 이같이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애순과 그의 꿈 속에 나타나 딸 애순을 안쓰러워하는 엄마 '광례'의 장면을 담은 그림 아래에 이같이 글귀를 새겼다.

4·3 이후의 삶을 무지개 바람으로 형상화 한 그림 '어멍 목소리 귀에 장장 들려'를 그리면서 '무지개 할망(할머니의 제주어)'으로 불리는 그는 이 그림에도 무지개를 그려넣었다. 할머니가 그린 무지개는 작품마다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움이자 위로이자 희망을 전하기도 한다. 할머니는 "(그 장면을 보고) 마음이 막(엄청) 아팠어"라며 "비가 개면 무지개가 뜨고 이제 곧 날이 번쩍하게 좋아져 벳(햇빛)이 쨍쨍 비추는데, 애순이에게도 그 기운이 전해졌으면 했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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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에 있는 '선흘그림작업장'에는 할머니의 그림처럼 제주 배경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주제로 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선흘 그림할망들이 선보이는 전시 '폭싹 속았수다, 똘도 어멍도 할망도'다.

전시공간인 선흘그림작업장은 마을주민들이 옛 농협창고를 개조해 만든 예술공간이자 최근 선흘 그림할망들을 위한 갤러리·레지던시 공간으로 새롭게 꾸며진 곳이다. 선흘마을에는 11명의 그림할망이 있는데, 이 중 9명의 할머니가 이번 첫번째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해 이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초록할망 홍태옥, 고목낭할망 김인자, 소막할망 강희선, 무지개 할망 고순자, 신나는할망 오가자, 우라차차할망 조수용, 우영팟할망 김옥순, 무화과할망 박인수, 불할망 허계생 등 9명의 할머니가 참여작가다. 2021~2022년 붓을 처음 든 이들의 평균 연령은 87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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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은 매일같이 이 공간으로 나와 그림을 그린다. 이에 '초록', '고목낭', '소막', '무지개', '신나는', '우라차차', '우영팟', '무화과', '불할망' 등 별칭이 붙여진 각자의 작업공간은 알록달록해지고 있다. 제주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자라온 요망진 소녀 '애순'과 무쇠처럼 우직한 소년 '관식'의 인생을 그린 '폭싹 속았수다'를 본 할머니들은 각자의 삶과 기억을 담아 드라마 장면들을 회화와 글로 표현해낸다.

드라마 속 주인공인 손을 잡은 애순과 관식의 머리 위에 해바라기 꽃이 피기도 하고, 밭일을 하며 다섯형제를 키운 자신을 떠올리며 양배추 밭을 그려보기도 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해녀 광례를 보며 물질할 때 쓰는 테왁과 전복을 가져와 직접 빗대어 대형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만해도 100점이 넘는다. 할머니들은 "여기서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 해가 가는 줄 모른다"며 미소를 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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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그림선생'인 최소연 작가는 "농부에서 화가가 되어버린 할머니들이 자신의 색깔에 따라 그려내는 그림의 세계관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시"라며 "단순한 그림 전시를 넘어, 공동체 기반 예술의 실천이 어떻게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할머니들의 작업실을 개방하는 '열린 스튜디오' 형식으로 운영되는 전시는 오는 6월 29일까지 이어진다. 관람은 매주 금·토·일요일(오전 10시~오후 5시)만 가능하다. 매주 신작이 발표·판매된다. 전시 기간 중에는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의 선흘포럼을 비롯해 관람객이 할망 작가들과 직접 교류하거나 창작 체험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자세한 사항은 소셜뮤지엄 누리집(www.socialmuseum.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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