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자의 하루를 시작하며] 잔인한 4월이여, 이제는 가라
작성 : 2025년 04월 30일(수) 00:00
[한라일보]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다. 정신적 혼미 속 희망이 사라진 황폐한 현실을 그는 그리 표현했다. 내가 맞이한 을사년의 봄도 참으로 잔인한 나날이었다. 먹고사는 것도 녹록지 않은 시대적 상황과 정치와 경제가 오염된 사회적 인식이 일상에 적색등을 켜댔다. 엘리엇이 은유했던 당시의 4월은 이보다 얼마나 잔인했을까.

대한민국이 일시 정지됐던 12·3 계엄, 2시간짜리 경고용이라던 계엄의 파고는 크고 깊었다. 다행히 국민 선진의식과 국회의 발 빠른 대응으로 대통령 탄핵안은 가결됐지만 온 나라가 혼돈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민간인이 사법기관을 습격하고 근거 불명의 억측들이 난무했다. 정치권이 아닌 일반 국민이 양분돼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극도의 상황이 펼쳐졌다. 가슴 조이며 묵묵히 일상을 지키던 대다수 국민은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구체적이면서도 간결 명료한 탄핵판결문 덕분이었다.

유례없던 산불 발생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산청, 하동 울주 등에서 바람의 속도대로 타들어갔다. 대단위 산림훼손은 물론 주택과 사찰이 소실되고 900년이 넘은 기념물 은행나무도 모두 불에 탔다. 사소하게 여겼던 예초, 성묘, 등산 등 일상적 부주의로 수 천명의 주민이 대피하고 수십 대의 소방헬기가 동원됐다. 진화대원과 주민들이 목숨까지 잃는 대참사를 겪었다. 일주일을 넘기고서야 겨우 주불이 진화됐다. 그러나 훼손된 산림자원은 수십 년이 지나도 원상복구가 될지 의문이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든 다시 돌발할 수 있다는 산불 경계에 아직도 우리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국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의 행보도 압박이었다. 갑자기 통보된 상호관세는 국가마다 비상 사이렌을 울렸다. 통상적 경제행위라기보다 관세 전쟁을 포고하는듯한 일방적이고 비상식적인 조치였다. 세계 증시가 폭락하고 각국의 경제 수장이 패닉상태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소비심리가 바닥인 상황에 매출은 감소하고 물가와 기업·가계의 이자 연체율은 증가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며칠을 못 가 트럼프는 90일 관세유예를 발표했지만 국제정세는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국내도 금리는 내리는 추세지만 가계 대부분은 돈 쓸 여력조차 없어 보인다. 그동안의 불황으로 문 닫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만 누적될 뿐이다. 이미 무너져 내린 저신용 취약계층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던가.

잔인했던 4월이 가고 있다. 국내 정세에도 글로벌 경제에도 따뜻한 기운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카네이션 한 송이에 웃을 수 있는 가정의 달, 부처님의 자비가 일상을 밝혀주는 부처님 오신 날, 움츠렸던 4월을 벗어나 은은한 귤꽃 향기에 취해보는 소확행 5월을 기대한다. 지리했던 을사년의 봄이여, 잔인한 4월이여, 이제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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