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년이 넘도록 맺힌 이슬-최승호
[한라일보]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
이슬이 걸리더라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
이슬이 걸리오
은하수를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도 이슬이 걸립니까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 이슬이
걸리는군요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
무서운 시다. 아니, 시란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 이슬에 걸리는 여치란 바로 세상을 건너는 당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득, 마주친다. 풀밭에 녹색 여치 한 마리. 눈이 휘둥그레지며 날아야 할지 뛰어야 할지 모르는 당신은 뒷다리를 이용해 뛸 수 있지만 날개가 퇴화해 날아갈 때 민첩할 수 없다. 당신의 방어 행동은 이슬을 지나가는 거지만 뒷다리가 이슬에 걸려 있다. 말의 저편으로 넘어가려는 생각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당신은 실은 투명한 이슬 한 방울에 갇혀 있는 게 아닙니까. 시치미를 뗄 수 없어 누군가 당신을 부추길 수 있지만 은하수는 멀고 당신의 몸부림은 보는 사람의 눈에는 그게 그저 고요하다. 이슬을 건너가는 중이니까.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슬을 건너가는 당신의 뒷다리에 이슬이 걸리오. 그런 마음에 걸리는, 이슬을 묻히고 걸어가는 한 글자 같은 여치. 한 글자의 반 같은 작은 여치. 이슬은 백만 년이나 되었고 당신의 무거운 짐은 이슬을 건너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짧은 인생의 한 컷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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