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74)구좌읍 상도리
[한라일보] 아직도 제주의 옛 정취가 구석구석 자세히 보면 남아있는 마을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면서 넓어지는 시야의 범위는 시각적 풍요를 선물하고 있다. 주택들이 있는 정주 공간에서 벗어나 용눈이 오름 방면으로 걸어서 올라가다보면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은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커지는 시각적 만족감이라고 할 수 있다. 놀라움을 주는 기괴함이나 거창한 모습은 아니로되 저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섬 제주가 보유하고 있는 숱한 가치들이 멀리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게 되는 놀라운 전망공간이다. 상도리의 높은 지대에서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오름들만 하여도 동쪽부터 지미봉, 은월봉, 두산봉, 우도의 우도봉, 일출봉, 대왕산, 대수산봉, 손자봉, 동거문오름, 높은오름, 다랑쉬오름, 악끈다랑쉬오름 등 동부지역 웬만한 오름들은 대부분 조망할 수 있다. 이유는 중산간마을 성격의 해발고도를 보유하고 있지만 행정적 마을 범위 내에 시야를 가릴 큰 굴곡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탁 트인 시야'가 가장 큰 자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동쪽으로 종달리, 서쪽으로 세화리, 남쪽은 성산읍 수산리, 북쪽은 역사적으로 원래 한 마을이었던 하도리가 있다. 이런 쟁쟁한 마을 사이에서 조상 대대로 양반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것은 그 평판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온 결과라고 한다. 마을 분위기 자체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하여 입신양명의 인생관을 전수하고 있기에 학문을 연마하여 관직에 나가는 일을 중시하였다. '공무원 없는 집안이 없다.'는 말을 기쁜 마음으로 들으며 자식농사에 더욱 정진하였던 사람들. 그러한 풍토를 외형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 있다면 리사무소에서 고등학교 담장까지 60m 정도 되는 곳은 상도리뿐일 것이다. 세화고등학교가 옆에 있으니 그러하다.
설촌의 역사는 이렇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 김여수라고 하는 분이 처음 이 곳에 들어와 봉천수 물통을 근거지로 생활하기 시작. 그 분이 이뤄놓은 물통을 '여수물'이라고 한다. 첫 거주지는 '가리막동산(현재의 장덕거리)' '종남물' 부근이었다고 한다.
상도리(上道里)라는 마을 명칭은 하도리와 한 마을이었던 시절에 '도의여'라는 이름으로 불려오다가 '道衣'에서 衣가 탈락되어 상도, 하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는 바닷가도 좋았던 마을이었는데 상도리 영역 바닷가에 송장이 밀려오면 '그런 일을 어찌 양반이 한단 말이냐?' 하면서 옆 마을에서 치우게 하고 바닷가도 가져가게 하다 보니 바다가 없어졌다는 이야기. 필자는 바다가 없는 중산간 마을로 알고 있었는데 엄연하게 바다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다를 등한시했다면 축산에는 관심이 많았다. 용눈이오름을 돌아가며 마을 목장을 형성하고 집집마다 소를 키우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15만 평에 달하는 마을목장에 축산계원들이 지금도 가축을 키우고 있다.
김희종 이장에게 상도리의 가장 큰 자부심을 묻자 자신감 넘치게 바로 대답했다. "상호존중입니다." 풀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선후배 간에 엄격함도 있지만 배려하고 서로를 책임져주는 불문율과 같은 문화를 마을공동체정신의 근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배와 후배가 몇 명이서 술을 마시게 되면 술에 취한 사람이 선배이건 후배이건 무조건 집에까지 모셔다드린다는 것. 쉬운 일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정서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려는 마음가짐이 평소부터 자리잡고 있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한 문화. 여기에서 문화는 문화의 정의가 설명하는 '동일 공간, 동일 시간 속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유형무형의 존재'를 의미한다. "당연한 일에 무슨 이유를 묻냐"고 하는 자세. 이러한 전통을 구축한 조상들의 정신문화가 오늘날에 커다란 자긍심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도리를 인생관의 중심에 놓고 살아온 양반촌의 뿌리가 이런 마을 풍속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는 어르신들의 설명이 더욱 아름답다. 상도리를 일컬어 '인간미 넘치는 미덕공동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을 햇살이 빚은 풍광
빛을 강조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색을 빼는 경우가 있다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오랜 세월을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온 팽나무 그림자를 그리려 하였다. 완만한 오르막이자 내리막 경사를 지닌 아스팔트 길 옆에 건장한 모습으로 서있는 나무기둥에 비하면 전봇대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집담과 밭담의 차이를 한 화면에서 이렇게 배치되어 드러나게 하는 경우도 쉽지가 않다. 채색 욕구를 억누르며 끈질기게 부여잡고자 한 것은 흑백사진처럼 오랜 전 느낌을 간직한 세월의 빛이다. 밭담이 보유한 명암의 요소가 욕심을 내서 그리게 된 연유이기도 하거니와 오른쪽 밭에 햇살을 받는 밭의 밖과 햇살을 받지 않은 밭의 안쪽 밭담이 굽이돌아가는 큰길로 인하여 발생되는 양면성이다. 그냥 단순하게 바라보면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이렇게 합창단처럼 자기만의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 모여들면 빛이라고 하는 엄숙하고 화려한 공통의 목적을 노래하는 힘을 보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색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나무가 돌에 기댄 것이 아니라 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이다. 팽나무 기둥에 기댄 돌담이 상징하는 바 무엇이랴. 마을의 역사, 조상님들의 굳건한 정신문화가 오늘날 쌓아올린 돌담과도 같은 노력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준다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린 것이다. 분명 저 굵은 기둥이 없으면 쓰러질 돌담. 아니, 기둥을 믿고 기대서 쌓은 모습이다. 시사하는 바 크다. 지나치지 않더라도 현실 속에 그대로 반영된 느낌을 어찌하랴.
지평선과 일출봉의 만남
일출봉의 높이는 해발 180m다. 그림을 그린 위치는 약 해발 90m 정도, 소실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지평선이 일출봉의 허리 이하를 가려버렸다. 당연하게 바다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출봉과의 위치적 상관관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보게 된다면 틀렸거나 이상한 그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을 햇살에 눈부신 무성한 목초지가 만들어낸 지평선이 일출봉의 높이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고 그렸다. 상투적으로 바라보는 일출봉이 아니라 상도리에서 목장지대로 가는 길에서 멀리 보이는 일출봉은 이러한 단순한 대비효과를 발생시킨다.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떤 의미를 풍경 속에서 발견하고 '자원화 할 수 있느냐' 고민하는 그림 작업이기에 이 장면을 목격하고 전율이 일었다. 전망대를 세워서 계단을 오르면 참으로 장엄한 모습이 교향악의 서곡처럼 시야에 펼쳐질 것이다. 좌우로 열리는 천으로 된 극장의 막이 아니라 땅 자체가 아래로 내려가며 펼쳐지는 무대가 연상되니 일출봉과 저 지평선 사이에 있는 숱한 아름다움이 저 지평선으로 인하여 그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겠거니. 가을날을 기다려 그리는 그림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얇은 구름들이 은은하게 떠 있고 그 사이로 태양광선이 내리쬐면 멀리 일출봉과의 공간감이 더욱 신비롭게 와 닿는 상황을 만나야 하겠기에 그런 것이다. 엉뚱한 욕구가 일어난다. 일출봉과 저 지평선이 만나는 지점이 정확하게 절반 90m라는 사실을 측량으로 입증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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