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뜨거웠던 여름을 더 뜨겁게 보냈다. 생전 써보지 않았던 글을 썼고, 이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렇게 펴낸 책에는 '기억이 문장이 될 때'라는 제목이 붙었다. 고정희(56, 제주시 도남동) 씨를 비롯한 16명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공동 자서전이다.
|책으로 방향을 찾다
돌아보면 글을 쓰는 데 흥미가 있었다. 초·중학교 때까진 문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 준비를 하며 좋아하던 책과도 멀어졌다. 책의 힘을 깨달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서면서다. 기댈 곳이 없어 외롭고 힘들 때 찾았던 게 '책'이었다.
"졸업을 하니 (학생운동을 하며) 친했던 학교 선배들과도 멀어졌어요. 졸업 이후에는 선배나 스승이 없었던 거죠. 모든 고민을 저 혼자 해결해야 되는 게 굉장히 외롭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서점에 가서 고민에 부합하는 주제의 책을 찾았어요. 사회생활을 하며 옷을 사거나 여행을 가는 대신에 제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책에 투자를 했더라고요. 책을 아주 열심히 읽은 것은 아니지만, 고민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책을 통해 위로를 얻었던 것 같아요."
2015년, 17년간 운영했던 외국어 학원을 그만두고 찾은 것도 다름 아닌 책이었다. 십여 년 동안 일만 보고 달려오다 멈춰 서니 공허해졌다.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 정희 씨가 말했다. 그때 향한 곳이 도서관이다. 그렇게 2016년부터 한라도서관 독서회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불안해도 반짝였던
책과는 나름 가까웠지만 글쓰기는 먼 존재였다. 학원을 폐업한 뒤 대학원에서 평생교육을 공부할 때에도 글쓰기에 깨나 애를 먹었다. 50페이지 이상 논문을 쓴다는 것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정희 씨는 "그때 정말 힘들게 논문을 썼다. 글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갈망이 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였다. 한라도서관에서 지난 6~8월 공동 자서전 쓰기가 진행된다는 소식에 마음이 움직였다. '글쓰기를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바로 도전했지만 생각과는 다른 수업이 펼쳐졌다. 하루 1시간 이론 교육을 끝으로 곧장 쓰기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 소재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강사님이) 우선 어릴 적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보라고 했어요. 만타라트를 이용해 그 안에 초등학교 때 역사적·경제적인 상황, 내게 있어서 기억에 나는 사건을 써 보라고 말이죠. 그렇게 두 가지가 나오면 그걸 가지고 짝꿍과 얘기해 보라고도 하고요. 글을 쓸 수 있는 소재가 될지 확인해 보는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보통 글이라면 그것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자서전은 나에 관한 거잖아요. 나만이 알고 있는, 나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다 보니 써지더라고요."
올여름 뜨겁게 떠올리며 쓴 얘기에는 10~30대의 정희 씨가 놓인다. 반짝이는 것보다 불안했던 젊은 시절이었다. 아버지와의 이혼으로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와 따뜻한 말을 나눠보지 못했다는 정희 씨는 "어린 시절이 굉장히 불우했다고 생각해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며 얻은 것은 불행의 그림자가 아니라 희망과 행복이었다.
"어머니 혼자 밭일과 해녀 일을 하면서 경제적인 것을 해결해야 했으니 저와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심리적으로 보살펴줄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항상 외로웠고 힘들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아요. (자서전을 쓰며) 내 어린 시절이 정말 불행했던가를 되돌아봤는데, 굉장히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거죠. 고향 (제주시) 협재의 아름다운 바다와 조개, 파래, 게처럼 그 바다가 주는 어떤 것들까지 말이에요. 소나무 밭에서 삼동(상동나무 열매)을 따 먹고, 도시락 가득 탈(산딸기)을 따기도 하고요. 이런 것들이 나를 굉장히 행복하게 했고, 나를 키워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을 기후위기 시대라고 말하고 자연환경이 파괴됐다고 하잖아요. 제 어린 시절은 이런 문제들이 정상으로 돌아갔던 시기였던 거죠."
남과 비교하며 좌절했던 '청춘 시절'도 꺼내졌다. 유학원에서 일하다 직접 유학원을 차리고 외국어 학원을 운영하게 되기 전까진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는 정희 씨다. 시쳇말로 '빽'도 없고, 전공인 일본어를 잘해 바로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런 열등감을 극복한 것도 결국엔 나 자신이었다. 정희 씨는 "(강의를 하면서) 1년간은 오전 2시 전에 자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위장약을 달고 살 정도로 뒤늦게나마 치열하게 공부했고 강의에 소질을 발휘했다.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었지만 잘 극복하면서 삶을 지탱해 왔더라고요. 그런 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총체가 자서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죠. 아직 자서전에 못 담아낸, 나만 아는 이야기들이 엄청 많거든요. 그런 얘기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충분히 힘이 돼 줄 것만 같아요."
|못 다한 이야기
이번 자서전에 못 담은 40대 이후의 삶도 엮어보고 싶다고 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공동체'가 될 것 같다고 정희 씨가 웃었다. '퍼실리테이터'로도 일하는 그에겐 여럿으로 쪼개지는 제주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얘기를 꺼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이전까지 제 삶은 이웃을 돌아볼 여유 없이 돈을 벌기 위해 달려왔어요. 먹고사는 게 더 중요했죠. 그런데 대학원 공부를 하고 독서 활동을 하면서 공동체가 왜 중요한지 알게 됐지요. 요즘 제주 제2공항 갈등만 해도 삶의 기반인 마을 공동체가 깨져 나가는 위험성에 놓여 있잖아요. 이런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제 경험을 통해 쓰고 싶어요. 잘 쓸 자신은 없지만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행동하게 하는 '계획'이 되지 않을까요."
취재·글=김지은 기자, 영상 촬영·편집=신비비안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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