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제겐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엄청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심지어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하기도 하고요." 박지나(44·제주시 용담) 씨의 말처럼 그는 "이야기가 쏟아질 운명"을 갖고 태어난 것 같았다. 지나 씨가 지난 한 해 제주시가족센터 상담실에서 마주한 인원만도 450여 명. 그는 이들의 이야기가 꺼내지는 순간의 '기록자'로 살고 있다.
|꿈을 탐구하다
대학원에서 심층심리를 전공해 상담가 자격을 갖췄지만 처음부터 갈 길을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꿈'을 기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게 좋아 들어선 공부였다. 2008년 시작한 '꿈 모임'이 동기가 됐다. 한 사람의 꿈을, 하나의 그룹에서 여러 명이 이야기하며 다루는 '꿈 작업'은 지나 씨에게 삶을 사는 "굉장히 흥미로운 도구"로 느껴졌다.
"꿈은 다 기억해요. 잃어버린 꿈이라든가, 내가 하려다 말았던 일이라든가. 이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거나 하면 나는 기억을 못 해도 꿈은 기억하는 거죠. 그때 그것을 꺼내놓고 사람들이 (꿈 작업을 통해) 건드려주면 알아차리는 거예요. '내가 이쪽으로 가서는 안 되는구나…'. 우리가 사실 인생의 3분의 1을 잠으로 채우는데 그것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게, 공부하면서 제일 놀라운 지점이었어요."
한때는 '꿈 작업'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먹고사는 일은 아르바이트로 대신했다. 그런데 문뜩 스스로를 '인정'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하루 일상의 대부분을 사람을 깊이 만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선택한 게 지금의 일인 '상담가'였다.
|상담으로 찾는 '최초의 조각'
제주시가족센터는 상담가로서 그의 첫 일터다. 지나 씨는 2020년부터 센터에서 일하며 상담이 필요한 이들을 맞고 있다. 직업으로서의 상담 경력은 5년 남짓이지만 그동안 개인, 부부, 가족까지 다양하게 만나왔다. 지난 1년간의 상담 횟수가 400회에 달한다.
그는 "'나를 알고 싶어 왔다'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고, 아이를 키우며 육아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찾고 있다"면서 "가장 많은 건 부부 상담이다. 두 사람 사이의 마찰이 거의 타협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해졌을 때 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가족 문제'라는 게 얼핏 비슷할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단순하지 않다. '대화가 안 된다', '너무 자주 싸운다'라는 저마다의 호소 밑에서 전혀 다른 문제가 끄집어지기도 한다. 지나 씨는 "어떻게 보면 내가 뭐 때문에 힘든지 알려고 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단번에 아픔의 뿌리가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상담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시간도 필요하다. "처음부터 되진 않지만 시간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딱 만날 때가 있다"고 지나 씨가 말했다.
"부부 문제든 개인의 힘듦이든 편안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더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유년기에 받았던 학대라든가, 학대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그 순간을 딱 만나는 '어떤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기억해 낼 때 말이죠. 그 '최초의 조각'을 찾는 순간을 경험한 내담자와는 굉장히 각별해지고 전우애 같은 게 생기기도 합니다."
지나 씨가 상담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목격자', '증언자', '기록자' 등으로 표현하는 데에도 이러한 경험이 영향을 준 듯했다. 그는 "모든 내담자들이 자기 역사에 증인을 필요로 해서 왔다고 생각한다"며 "자신한테 가장 진실한 감정을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그 얘기가 나오고 누군가 딱 들어주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보며 얻은 삶의 변화
한 번 신청하면 6회(개인)에서 10회(부부)까지 상담이 이어지지만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정해진 기간 안에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 남겨지기도 한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가 일종의 '율법'처럼 작용해 마음속 진실에 다가가기 어렵게도 한다. 지나 씨가 지켜봤던 많은 이들이 그랬다.
"나를 세상에 낳아줬고 지지를 받으며 컸다고 해도 부모 역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 안에서 다친 기억이 없을 리 없거든요. 그걸 아는 게 사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알아야 나도 내 자녀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나를 보겠다'는 결정은 삶의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지나 씨는 믿는다. 이는 엄마와의 관계가 불편했던 그의 실제 경험담이기도 하다.
"저도 상담을 받으면서 5살 때 기억이 고구마 줄기 끌어올리듯 캐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나를 봤던 표정, 시선, 눈빛, 내가 느꼈던 좌절감 같은 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전까지 내가 굉장히 미화하려고 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나 엄마와 나의 관계의 밑을 보게 되면서 진실에 좀 더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그것을 아는 것을 토대로 관계를 맺는 것은 분명 이전과는 굉장히 다르게 되죠."
|행복한 가족이란
행복한 가족의 조건을 묻는 질문에 지나 씨는 잠시 고민하더니 "유머"라고 답했다. "유머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심리적인 여유 공간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단, 조건은 있다. 누군가 웃기려는 말과 행동에 굳이 웃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가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진실들이 오롯이 존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성인기 이후에는 1년에 한 번, 형식적으로 만나는 관계가 되겠죠. 그 이상의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때그때 내가 느끼는 그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있어야 해요. '다르게 행동해도 괜찮다'라는 여유와 그것을 품어주는 분위기라면 좋을 것 같아요."
그가 제안하는 또 다른 실천법은 '비폭력 대화'다. 관찰과 느낌, 필요, 부탁, 모두 4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비폭력 대화는 한마디로 상대에 대한 평가를 빼고, 사실에 기반해 서로 다치지 않게 주고받는 말이다.
"'당신이 어제 나를 열받게 했을 때'라고 말하는 것은 평가예요. '당신이 어젯밤에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 때'라고 말하면 적어도 팩트이지요.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느낌과 필요, 구체적인 부탁을 전달하는 거예요. '나 그때 굉장히 혼란스럽고 앞이 깜깜했어. 지지가 필요했거든. 다음엔 내 손을 잡아주면서 말해줄 수 있을까'처럼 말이죠. 처음부터 잘 되진 않겠지만, 이런 대화법이 일상에서의 우리의 대화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게 해 주는 면이 있어요."
|"내 얘기 꺼내 보세요"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상담실을 찾지만, "그 문지방을 넘어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건강하다"고 지나 씨는 말한다. "타인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려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은, 힘든데 도움조차 청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어릴 적 감정을 수용 받는 경험을 하지 못한 이들일수록 도움을 구하는 심리적 능력을 키우지 못한 채 자라게 된다고 지나 씨가 설명했다.
"어쩌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출발선이 될 거예요. 그 출발점에서 내가 사실 얼마나 귀하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것은 어떤 식량 같은 게 돼 줄 거고요.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심리에선 굉장히 큰일이에요. 그걸 꺼내놓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만 해도 굉장히 큰 걸음이고요. 그래서 시작이 반인 거죠. (상담실에) 한 번만 오고 안 와도 되니 도전해 보길 권해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그 얘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당신삶)
수많은 삶은 오늘도 흐릅니다. 특별한 것 없어도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모여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당신삶'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삶을 마주하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 문을 열어 주세요. (담당자 이메일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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