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문을 여니까 그냥 세상이 훤했어. 여기저기 집들이며 집 앞 올레며 초등학교까지 모두 불붙고 난리였지." 76년이 흐르도록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1948년 12월 3일, 문철부(87) 씨에겐 깜깜한 밤의 적막을 깼던 그날의 총소리가 여전히 쨍하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가 고향인 철부 씨는 4·3 유족이자 당시를 겪은 생존자다. 그래서 더 처절했던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었지." 4·3 당시 어머니와 형을 잃었다는 철부 씨는 열한 살의 기억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히 돌이켰다.
|'도피자 가족', 그 비극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한 다음날) 세화 사람들은 다 모이라고 했어. 세화지서 앞에 가 보니 한 100여 명 정도가 있었는데, 군인들이 나오고 소위가 앞에 서서 연설을 하더라고. '내가 여러분의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말이야. 조금 있으니 한 대 여섯 명을 끌고 와서는 밭 구석에 쭉 세워 놓고 총을 마구 쐈어. 그때 사람을 죽이는 걸 처음 봤지, 나도."
무장대의 세화리 습격으로 주민 50명가량이 살해된 이튿날인 1948년 12월 4일이었다. 군경토벌대는 보복하듯 학살을 자행했다. 극한의 이념 대립을 둘러싼 '무고한 죽음'이었다.
대립이 격화되면서 철부 씨의 집안도 바람 잘 날 없었다. 제주시내 중학교에 다니며 3·1절 집회 등에 나섰던 형이 몸을 숨기자, 가족들에겐 '도피자 가족'이란 낙인이 찍혔다. "춥고 비가 와서 땅이 질퍽질퍽했던" 어느 날, 세화지서에 끌려갔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몇 시간 만에 "몰골이 말이 아닌 채"로 돌아왔다. 걸어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맞았다는 아버지는 마차에 실려 집에 돌아온 뒤 1년 넘게 일어나지 못했다.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철부 씨, 시집 안 간 막내 누이의 수용소 생활이 시작됐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세화지서 수용소로 쓰였던 빈 초가집 한 칸에는 처음 보는 이들도 많았다.
철부 씨는 "(같은 구좌 지역인) 하도리, 종달리 도피자 가족도 잡아다 놨는데 다리를 펴서 앉지 못할 정도로 빽빽했다"면서 "이후에 세화리 도피자 가족 10여 명만 세화리 공회당에 있는 소방펌프 창고로 옮겨졌는데 구부리고 앉아야 될 정도로 좁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떠올렸다.
|장례조차 못 치른 죽음
수용소에서 이름이 불려 끌려 나간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순경이 오면 이번엔 또 누구를 죽일까 조마조마했다"고 철부 씨가 말했다. 그렇게 스무날이 넘게 흘렀다.
"저녁때였는데, (수용소 밖에 있던) 셋누님(둘째 누나)이 밥을 해서 헐레벌떡 왔더라고. 막 울면서 말이지. 가져온 밥을 풀어놓는데 세상에 없던 밥이야. 쌀밥과 돼지고기와 무, 메밀가루를 넣어 끓인 국이었지. 확인은 안 해 봤지만 그때 밖에선 오늘 다 죽인다고 소문이 난 것 같아." 도피자 가족 집단 학살이 있었던 1949년 2월 10일, 그의 어머니도 돌아오지 못했다. 밥을 가지러 간다고 자리를 비웠던 막내 누이와 죽기 직전에 풀려난 철부 씨만이 목숨을 구했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죽음이었다. 급한 대로 시신 위에 노람지('이엉'의 제주어)와 모래흙을 덮어 가매장했다. "바람이 막 불면 (모래흙이 불려서) 노람지가 나와 있어. 그럼 어머니 무덤에 가서 다시 흙을 덮어 놓고 왔지. 그렇게 집에 돌아올 때면 꼭 어머니가 따라오는 것 같아. 그래서 자꾸 돌아보고는 했어." 큰 울음을 삼키며 철부 씨가 말했다.
'도피자'라는 이유로 15년형을 선고 받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던 형은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대구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됐던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형 문철수 씨는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에 이름 세 글자로만 남아 있다.
|기록이 된 '증언'
가족을 잃은 아픔에도 죄인이 돼야 했던 세월이었다. 임시직으로 첫발을 내딛었던 공직에선 '신원조회' 때문에 앞날이 막힐 뻔도 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윗사람들 덕에 계속 근무를 하며 정규직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공무원 생활을 했던 30여 년간 4·3에 대해선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철부 씨가 4·3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다. 어머니와 형이 4·3 희생자로 결정 받은 즈음이었다. 어린 시절, 그가 수용소에서의 직접 겪었던 일은 기록으로 각인돼 '4·3의 야만성'을 알리기도 했다. 제주4·3평화재단 이사를 지냈던 허영선 작가의 석사논문 '제주 4·3시기 아동학살 연구'에는 철부 씨의 증언도 담겨 있다.
이제 4·3은 말할 수 있는 역사가 됐지만 철부 씨에겐 여전히 '미완의 역사'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4·3 왜곡·폄훼 발언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멀게만 느껴지게 한다. '보상'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 앞에서 죄 없이 죽어가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대 그렇게(역사를 왜곡해) 생각할 수가 없거든. 4·3을 왜곡하지 않도록 제대로, 널리 알려줘야지. 돈(보상금)은 있으나 없으나 그만이지만 명예회복이 제대로 되고, 4·3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되려면 한참이나 더 지나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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