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4)자주운항운동-②기업동맹의 활동과 좌절
북해환과 순길환… "제주 개발은 제주사람의 손에 의해서"
작성 : 2024년 02월 27일(화) 00:00
기업동맹의 조직, 북해환의 취항

[한라일보] 일본어판 신문인 목포신보 1929년 5월 28일 자 제주 특파원의 기획기사에는 제주와 오사카 간 직항로 운영 현황에 관한 독특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도내 김녕 부근에서 오사카로 출가노동 하러 나가 있는 청년을 중심으로 제주기업동맹회라는 것이 조직되어 수천 원의 기본금을 손에 넣고 북해환(北海丸)을 전세 내서 오사카와 제주도 사이에 취항시켰다. '제주도의 개발은 제주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주에서 출가노동하러 가는 사람은 제주사람이 경영하는 배에 타라'는 선전이 널리 퍼졌을 때, 조선우선, 아마사키는 꽤 강력한 대책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자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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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언급한 '제주기업동맹회'는 제주 출신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고순흠이 주도해서 설립했던 '기업동맹 기선부'를, 취항시킨 기선 '북해환'은 '제2북해환'을 말한다. 기업동맹은 1928년 12월 10일에 가맹원 16명이 각자 300원씩 출자해서 결성되었다. 이때 300원이라고 하면 조선인에게는 거금이다. 16명의 실명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오사카에 거주한 제주도민 또는 조선인 중소자본가로 추정해 볼 따름이다.

기업동맹은 결국 홋카이[北海]우선의 제2북해환(第二北海丸)을 전세로 빌려 1929년 1월 2일 오사카항에서 제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간행된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에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생의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기업동맹의 사람들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손으로 만든 배로 가장 싸게 조선 본토 간을 오고 갈 것이다'라는 취지 아래 여러 해 계획 중"이라고 했다. "1개월간에 오사카와 조선 사이를 왕래하는 조선인은 대략 4000명, 이것에 주목한 조선우선과 아마사키기선의 두 회사는 서로 잘해 나가던 참에, 1928년 12월부터 '조선인은 조선의 배로'라는 용감한 방침을 내건 오사카 거주의 제주도기업조합의 제2북해환이 끼어들어 세 회사가 심한 경쟁을 하였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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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동맹과 제주의 아나키즘 항일운동

기업동맹 기선부는 결성취지문을 통해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오사카-제주도 간 독립항로는 물론이요, 장래 전 조선 항로를 경영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고 생각한다. 금후의 경영은 당연히 제주도민 전체의 직영에로 돌려보내게 될 것"을 표방했다. "직영의 이해 처분도 역시 제주도민 전체의 본위로 행(行)"할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승선자의 동리(洞里)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인원수의 비례대로 제주도 13면 167개 리의 지방산업과 교육자금의 재원을 삼기 위하여 각리(各里) 리유(里有)재산으로 편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공동재단을 조직하여 독립 항로의 영구한 유지책과 흥산장학(興産奬學)의 시설에 공헌하고 순공영자금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렇듯이 기업동맹의 자주운항운동은 사유재산제나 국유제가 아니라, 사회공유제(아나키적)를 기반으로 하는 자주관리체제를 지향했다. 기업동맹을 주도한 고순흠은 제주도 아나키스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후반 아나키즘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우리계' 조직원들과 연결되었다. 우리계는 "자유인의 결합에 의해 소비조합을 조직하고 각 지방의 생산기관과 교통기관을 장악하며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 경제제도를 실시"하는 것을 노선으로 삼았다. 당시 제주도의 산업을 선도하던 선박업자들(고영희·강기찬 등)이 조직에 포괄된 까닭도 이러한 노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이 매월 3원씩 납부했던 조합비는 자주운항운동의 자금으로 축적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아나키스트들은 상호부조 공동체의 제주도 전통사회에 바탕을 두고 이상사회를 건설해 보고자 했다. 제주도의 중앙정부에 대한 강한 배척, 지주나 자본가가 없는 사회경제적 상태, 공동체적 유대의식의 견고함 등은 아나키즘이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었다. 어쩌면 기업동맹의 자주운항운동과 연결된 제주도 아나키스트들의 마음속에는 일제 통치를 거부하는 대신 제주도민의 자율과 자치가 보장되는 독립국이 그려졌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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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길환의 취항

기업동맹은 제주도 아나키스트들과 협력하여 제주도에 총대리부와 항만대리부를 설치하여 하객과 하물 취급 업무 등을 분담했다. 운임도 9원으로 인하하고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는 등 의욕적으로 경영해 나갔다. 그러나 채 몇 달도 되지 않아서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이에 기업동맹은 1929년 5월 9일 가고시마[鹿兒島]우선주식회사와 업무위탁계약을 체결해 순길환(順吉丸, 1400t)을 취항시켰다. 운영 방식은 가고시마우선이 기업동맹의 경영권을 승계하고, 기업동맹은 하객 취급 업무를 담당하는 협업 방식으로 결정했다. 순길환 홍보그림(사진 4)에 적힌 '일선융화(日鮮融和)'란 구호는 공동운영을 표방한 것이며, 이는 뒷날 동아통합조합의 공격을 받는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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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길환은 본 계약이 체결되기 전인 1929년 4월 16일 오사카에서 제주도로 첫 출항에 나섰다. 기업동맹이 제2북해환, 순길환 등을 취항시키며 선임을 9원으로 내리자, 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 측은 3원으로 대폭 내리며 맞대응했다. 순길환도 하는 수 없이 3원으로 보조를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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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흠은 순길환의 사무장이 되어 항해선에서 승객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고준석은 자서전에서, 1930년 여름 순길환에 승선했을 때 고순흠이 선상에서 "태산을 옆에 끼고 대해를 건널 수는 없지만, 조선 민족은 자각과 단결만 있으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연설한 것을 기억했다.

기업동맹은 낮은 선임으로 인해 경영실적의 침체를 겪었다. 1931년 12월 종래 가맹원 16명이 300원씩 출자한 소수 조직을 각자 3원 출자의 대중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선전 활동을 전개했지만, 사업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같은 제주도민이 주체가 된 동아통항조합의 출현과 치열한 경쟁과 갈등(자세한 내용은 후속 연재 예정)으로 인해 결국 기업동맹은 1933년 말 동아통항조합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고순흠과 민족자본가, 제주의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자주운항운동이 허무하게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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