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3)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의 취항
"오사카 직항로를 독점한 일본자본" 자주운항의 전사(前史)
작성 : 2023년 12월 26일(화) 00:00
[한라일보] 지난 회에 서술한 대로 1923년 2월부터 제주도와 오사카를 직항하는 전용기선의 항로가 처음 열렸다. 맨 먼저 오사카행 배를 띄운 주체는 제주의 토착자본가들이 세운 제우사 기선부와 제주상선주식회사였다. 그러나 제우사는 자본력의 열악함 때문인지 작은 기선을 운항시키다가 8월 이후 제주상선에 통합되었다. 제주상선 또한 1924년 이후 일본자본 아마사키기선과 제휴하여 제주도 항포구의 거룻배를 운영하는 하청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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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대형 기선을 동원해 제주-오사카 항로에 뛰어든 업체는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아마사키기선이었다. 이 회사는 아마사키[尼崎] 가문이 해운 중심의 사업을 전개한 간사이[?西] 지방의 재벌이었다. 원래 '尼崎'는 효고[兵庫]현의 지명으로는 '아마가사키'로 읽지만, 경영자 가문의 성을 가리킬 때는 '아마사키'로 읽는다. 1880년부터 해운업을 시작했는데. 1920년대에 제주-오사카 노선, 인천-오사카 노선을 운영했다.

아마사키기선을 제주-오사카 항로에 참여토록 움직인 인물은 조천리 출신의 김병돈이었다. 그는 조천공립보통학교의 설립에도 기여한 바 있는데, 일찍이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조선인구제회'를 조직해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권익 수호 활동을 했다. 그는 아마사키기선과 제주상선과의 협력을 이끌어 직항로 개설을 주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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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사에 이어서 1923년 3월 아마사키기선은 최초의 배를 제주-오사카 항로에 띄웠다. 처음 운항한 배는 군대환이 아니고, 다이유마루[大有丸](581t)였다. 군대환의 첫 출항 기록은 1923년 6월 1일로 확인된다. 지금까지 많은 글에서 군대환이 부정기항로로 1922년부터 제주-오사카 항로에 운항했다고 기술해 왔다. 그러나 1923년 3월까지도 군대환은 오사카-웅기(함경북도) 노선에 취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다.

군대환은 일본어로 '기미가요마루'로 불렸다. 기미가요[君が代]는 일본 국가(國歌)로, '천황 통치가 천년만년 이어지리라'며 일왕 치세가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기미'는 곧 일왕을 지칭한다. 이 배를 탔던 제주인들이 일왕을 숭배하는 이름의 군대환을 어떻게 인식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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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환은 제1군대환과 제2군대환 두 척이 존재했다. 제1군대환은 네덜란드 선박을 개조한 것으로서, 669t 정도의 중형급 증기선이었다. 1923년 6월 이후 제주-오사카 항로에 나선 아마사키기선의 주력 기선이었다. 그러나 제1군대환은 1925년 9월 6일 오사카로부터 목포로 향하던 도중 태풍을 만나서 제주도 고산-용수 해안에 좌초·파선되었다.제2군대환은 제주도 해안에서 좌초한 제1군대환 대신으로 제주-오사카 항로에 투입된 배였다. 1925년에 소련 정부로부터 구입한 군함 '만주르'를 개조했다. 총 919t, 길이 62.7m의 배로서, 식민지 시대 제주인들의 기억에 남은 '군대환'은 이것을 말한다. 1926년 6월부터 제주-목포-오사카 간 매월 4회의 정기항로를 운항했다. 매일신보 기사(1926년 6월 16일)에는 1500t, 객실 정원 1000명이라고 하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1934년 실제 군대환에 승선했던 마쓰다 이치지[?田一二]가 승객 정원은 365명이지만, 최대 685명까지 승선이 가능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1927년경 군대환의 운임은 편도가 12원50전이었다. 당시 오사카 방적공장 여공의 일급이 1원이었다고 하니, 여공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싼 운임이었던 셈이다. 제2군대환은 선령 44년의 노후선으로 그 뒤 20여 년간 취항했다. 1945년 4월 오사카 아지가와[安治川] 부근에 정박해 있다가 미군의 공습을 받아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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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제주도와 한반도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배편을 가장 많이 소유한 선박회사는 단연 조선우선주식회사였다. 조선우선은 1912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국책회사로서, 조선 연안과 일본 근해를 무대로 배를 띄웠던 식민지 조선 최대의 해운회사였다. 1912년 테라우치 조선총독은 민간 해운업자들이 개별적으로 경영해 온 기존의 연안항로를 조선총독부가 일원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자본금 300만원의 조선우선을 설립했다. 조선우선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자본을 주축으로 일본우선주식회사, 오사카상선주식회사 등 일본 내 자본가들까지 주주로 확보해 투자를 유치했다. 사장으로부터 임원 모두 일본인이었다.

창업 당시 조선우선이 보유한 선박은 기선 26척과 범선 1척으로서, 부산, 목포, 인천과 제주도를 연결하는 노선을 독점적으로 운항했다. 조선우선이 본격적으로 조선에서 일본 오사카·고베로 가는 한신[阪神]항로를 개척한 시기는 1920년대였다. 조선우선 측은 한신항로 중에서도 1923년 개설된 제주-오사카 직항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취항을 준비했다. 조선일보 기사(1923년 8월 23일 자)에는 '조우 암중 비약(朝郵 暗中 飛躍)'이라는 제목 아래 제주도 산지와 성산포 회조부를 중심으로 제주인들의 의견을 들어서 운항 동의 서명을 받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조선우선은 1924년 2월 제주-부산-오사카 항로에 함경환(咸鏡丸)을 출범시켰다. 1912년에 매입한 함경환(802t)은 원래 원산-청진 항로에 취항 중이다가 이때 제주-오사카 항로에 투입되었다. 1924년 5월에는 기항지에 목포를 추가하여 제주-목포-부산-오사카 노선을 2주에 1회 왕복 운항하기 시작했다.

1924년 조선우선은 근해항로에 적당한 1천t급 이상의 선박을 다수 구입하면서 경성환(京城丸, 1033t, 정원 338명)을 매입했다. 경성환은 함경환이 운항하던 원산-청진항로에 대신 취항하다가 1926년부터는 제주-오사카 항로에 투입되었다. 이때로부터 1932년 함경환이 매각 처분될 때까지 2척이 함께 운항했다. 경성환은 조선우선이 경영상의 문제로 1935년 4월 25일 제주-오사카 항로 운항을 중단한 뒤 휴항하다가 같은 해 8월에 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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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오사카 직항로를 개설하는 데 앞장섰던 제우사, 제주상선주식회사, 김병돈 등 재일 제주인들은 1년도 안 되어 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의 일본 자본에 포섭되어 버렸다. 그 결과 두 선박회사의 독점에 따른 문제가 심각해져 갔다. 오사카로 출가노동을 가던 제주인들은 높은 선임 부과, 과적과 열악한 승선 환경, 선박회사의 불친절 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한 해에 5만 명이 넘는 막대한 인원이 오사카 도항선을 이용하건만, 이러한 불이익과 부당함, 불편함은 고스란히 제주사람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제 192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제주인들의 자각과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제주도기선(영보환), 기업동맹(순길환), 동아통항조합(교룡환, 복목환) 등 우리 배를 띄우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게 되었다. 제주인들이 주인이 되는 자주운항의 맹아가 생겨난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주운항운동에 대한 글을 이어갈 것을 기약한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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