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35)나 오늘 한가해요 - 김경훈
작성 : 2023년 09월 19일(화) 00:00
70년대쯤 선데이서울에
반라의 여인이 야릇한 자세로,
"나 오늘 한가해요!"
요즘은 안 바쁜 게 죄인 양
모두가 언제나 쫓기듯 겨우,
"나 오늘 무지 바빠!"
숨가쁘게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한가하게 버려진 나는,
"사람이 오건말건, 사랑이 가건말건!"
벤치에 앉아 병들어 불퉁해진 미루나무 옹두리를 바라보다 멈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절쑥대는 가을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이 시인은 한가하게 버려진 혹은 한가하게 버려질 줄 아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활 세계의 어느 자리에 시침 핀을 꽂듯 주도권을 내려놓고 듬성듬성 시간을 꿰매는 시인은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숨 가쁘게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불행 또는 슬픔의 얼굴을 보고 있다. 왜? 라고 묻는다 해도 답변을 주지는 않는 채 "오건 말건 가건 말건"이라는 마음의 틈새로 찾아오는 한가하고 말랑말랑한 시간을 즐기며, 잊혀짐 마저 마다하지 않는 자세이다. 세상은 그림자나 이미지의 연속이어서 그것들은 순간순간 명멸할 뿐 실재 영원한 건 없다. 앞에 가는 사람이 뛰고 있어서 뒤에 가는 사람도 뛰어야 하는 정신없는 지상의 한쪽에서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걸으며 삶을 조망하는, 어느 산책자의 꿈이 시에 새겨진다. 세상에서 필요한 게 이것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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