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5)한경면 용수리
드넓은 경작지·기름진 바다 품은 마을… 명성 되찾기 동분서주
작성 : 2014년 08월 26일(화) 00:00

논농사에 이용됐던 제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용수저수지(위)와 마을 전경(아래).

도내 최대 규모 저수지 활용 관광자원화 방안 모색중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 김대건신부상해서 사제서품 후 귀국중 표류하다 표착한 장소열부 고씨의 절개 기리면서 음력 3월 절부암서 제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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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환경만큼이나 스토리가 풍성한 마을이다. 동네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는 마을. 원래 두모리라는 큰 마을에서 다섯 마을이 떨어져 나왔는데 그 중에 한 마을이다.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 곳에는 가뭄에도 샘물이 너무 잘 나와서 '숭숭물'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명 승수리(勝水里)로 부르다가 100여 년 전부터 용수리라는 마을 이름을 얻었다. 탐라지의 기록으로 추측하는 용수리의 역사는 이렇다. 고려공민왕 원년(1352년) 우포에 왜선이 침입하였으며, 태종 18년(1416년)에 왜적이 우포, 차귀 등지에 침입하였다. 마을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400년 전, 절부암 옆 '굴터'라는 곳에 도요지가 있었다. 도공들의 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매년 음력 3월 15일이면 한경면 여러 마을 사람들이 용수리 절부암에 모여서 마을제에 참여한다. 바다에 나가 행방불명된 남편 강사철을 찾아 바다를 헤매다가 결국 남편 곁으로 간다며 엉덕동산 후박나무에 목을 맨 열부 고씨. 3일장을 치르던 날 아침에 남편 강사철의 시신이 부인이 목을 맸던 언덕 아래 떠올랐다고 한다. 그 사연과 절개를 기리는 제사다. 1853년이면 철종 때 일. 대정판관이 고씨가 목을 맨 자리에 절부암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글씨가 강직하고, 깊이가 있다. 풍기는 그 자체로 절개를 느끼게 하는 기품이 서려있어 보는 이를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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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리는 기념비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박해로 신음하는 조국에 복음의 빛을 밝히고자 사제 서품 즉시 귀국길에 오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이 1845년 8월 31일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귀국시 풍랑을 만나 28일 간을 표류하다가 결국 표착하여 첫발을 디딘 용수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역사적 장소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 곳 해안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한 뒤, 타고 온 라파엘호가 수리되자마자 망설임 없이 목적지로 향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박해의 칼날 아래서 순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세월이 지나 제주의 신앙 후손들이 나서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을 길이길이 새겨두기 위해 용수리 바닷가에 기념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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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와 경계를 이루는 당산봉에 올라 용수리를 바라보면 평온한 밭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 면적의 반 이상이 밭으로 이뤄진 용수리. 80년대 중반까지 250가호가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그나마 풍요로움을 누리던 사람들의 땅. 당시에는 땅보다 기름진 바다가 있어서 해녀들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250가구가 사는 마을에 해녀가 150명이 넘었다는 것은 해녀 없는 집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린 비바리들도 수경 없이 바다에 들어가 전복과 소라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해산물이 많았다는데…. 64세 나이에도 현역 해녀인 마을회 양명선 감사는 "지금은 30명 미만의 해녀가 용수리 바다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1960년대 한림수협에서 해녀대회를 하면 항상 1등을 싹쓸이했다는 상군해녀의 요람이 용수리 바다. 특이한 것은 용당리와는 바다가 나눠져 있지만 고산리와는 차귀도 바다를 포함하여 공동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한진 전 이장은 용수리 사람들이 강인하고, 그 어느 마을 사람들보다 용기가 있는 것은 해녀들의 후손이라서 그렇다고 단정한다. 논이 있어서 제주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가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경쟁력을 잃어버려 35㏊의 논이 방치되어 있다. 곡식을 부르는 것이 땅이라고 하거늘 대답이 없다. 논을 잃은 저수지는 농어촌공사의 일거리로만 존재하고. 명절이 가까워오면 조상님께 올릴 '곤밥'을 짓기 위해 용수리를 찾았던 아낙네들은 이 마을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하지만 먼 옛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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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리는 옛 영광을 되찾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그 꿈을 듣다 보면 답답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용수리가 고향인 좌남수 제주도의원은 힘주어 용수리 저수지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논농사용이었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미래를 위하여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한 저수지의 경관적 가치를 자원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김대건로를 인근 해안도로 전체로 확대하는 방안 또한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실현시키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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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두 용수리장은 당면 과제 해결이 꿈이라고 한다. 우선은 1995년에 문을 닫은 용수초등학교 건물과 부지 1만1500㎡(3500평)을 활용하여 관광인프라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행정적으로 막힌 것들을 뚫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교육행정 차원에서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바라봐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35㏊에 달하는 휴경지를 어떤 형태로든 농업목적에 부합하도록 개발하여 주민들의 소득향상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다. 김한진 전 이장의 꿈은 야무지다. 당산봉에 터널을 뚫어서라도 고산 해안도로와 연결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동안 수없이 건의했지만 예산타령과 경관보전 등으로 막혀있는 것을 어떻게든 뚫겠다는 의지다. 김성은(79) 노인회장에게 100억원이 주어지면 마을회를 위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단박에 나오는 소리가 "수송기를 사야지!" 마을 전용 수송기를 사서 용수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직접 대도시에 보내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농산물 유통업자들에게 이윤의 많은 부분을 뜯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으면 그 오랜 응어리를 저런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풀어보나. 해녀인 양명선(64) 마을회 감사에게 '20년 후 84세가 되었을 때 꿈'을 여쭈었더니 가슴 뭉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때도 변함없이 용수리 바다를 지키는 해녀로 일하고 싶다." 집념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들이 마을의 꿈을 실현시키는 원동력이다. 필자는 용수리 바닷가의 노을을 사랑한다. 동화 속에 들어온 느낌을 받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용수리 바닷가는 조금만 이동을 해도 차도가 오묘하게 그 모습을 변모하느는 마력이 있다. 이스터섬의 석상이 배영 자세를 취하고 누워있는 모습과 돌고래가 등을 내밀고 바다 위를 헤엄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용수리의 가장 큰 매력은 밭들이 주는 공간적 여백에 있다. 바다와 잇닿으면서 증폭된다. 품고 있는 스토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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