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4)표선면 가시리
조선시대 갑마장 등 목축문화 토대로 ‘힐링 마로(馬路)’ 꿈꾼다
작성 : 2014년 08월 19일(화) 00:00

풍요로운 부자마을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는 내년부터 풍력발전단지에 부지 임대료로 연간 10억원의 마을기금을 조성하게 된다. 사진은 가시리 풍력발전단지 전경

교통불편 등으로 낙후된 지역서 자연자원 활용해 부자마을 도약숱한 개발업자 유혹도 마다하고 최고 말 기르던 갑마장 역사위에광활한 자연 만끽하게 준비 박차

참으로 큰 마을이다. 가스름이라고 불러오다가 가시리(加時里)라는 한자로 바뀌었다. 뜻이 좋다. '시간을 더해가는 곳' 700년의 역사로 이야기하기에는 그 시간의 의미가 너무 좁다. 꿈꿔온 세월 또한 그러하고.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이 제주에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라고 한다. 고려 말에 대제학을 지낸 학자. 이성계 제거 모의에 연루되어 제주로 가족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래서 가시리에는 충의사가 있다. 500여년 뒤에 제주에 유배왔던 면암 최익현 선생이 감복의 비문을 남겼으니 충의사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곧은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곧은 사람이 알아본다고 했던가. 가시리는 본동, 안좌동, 두리동, 폭남동, 역지동, 생기동과 같은 6개의 작은 동네들이 모여 큰 마을을 이룬다. 면적은 표선면의 43%정도라고 하니 입이 쩍 벌어진다. 마을공동체가 소유한 땅만 742만㎡(225만평)이다. 가시리 번지를 달고 있는 오름만 13개 정도. 설오름, 병곳오름,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작은사슴이오름, 갑선이오름, 번널오름, 붉은오름, 여문영아리오름, 거문오름, 구두리오름, 마은이옆오름, 쳇망오름. 단순하게 땅부자 마을로 바라보기에는 보유하고 있는 방대한 잠재력이 더욱 무섭다. 어찌하여 이리도 마을이 넓은가? 조선왕조 시대에 제주섬 대부분 지역은 국영목장이었다. 거기서 으뜸으로 치는 마장이 있던 지역. 갑마장은 최고의 말들을 모아 기르던 곳이기에 목장지대로서 완벽에 가까운 환경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곳에 남아있는 잣성 흔적이 목축문화의 깊고 긴 여운을 노래하는 듯하다. 4·3의 상처가 깊은 마을이다.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탔던 그 때. 514명이 몰살된 것으로 공식기록에는 남아있지만 가족 전체가 목숨을 잃은 집안과 제주에 살고 있지 않은 가족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누락된 이들까지 합하면 600명이 넘을 것으로 김영일 가시리장은 주장하고 있다.

지금의 마을은 그 처참한 비극의 장소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다시 재건한 생존의 터전이라고 한다. 4·3이 남긴 특이한 결과가 있다. 당시에 가시리 가옥 전부가 불타면서 마을목장 조합원들과 관련된 문서도 모두 소실된 것이다. 누가 목장조합원이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은 곧 누구도 재산권을 주장 할 수 없었기에 지금도 마을목장은 매각할 수 없는 땅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의식이 있다면 마을공동체의 재산은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준 유산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는 후손들에게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고. 그것이 4·3으로 말미암은 우연이라 할지라도. 그동안 광활한 목장지를 보고 숱한 개발업자들의 유혹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뿌리치고 자연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었던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의 결속력이 더 큰 미래를 향하여 줄달음질 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우직하고 신중한 역사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시절, 가시리는 낙후된 지역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27년 전에 가시리로 시집을 왔다는 강명숙 부인회장은 시집가는 곳이 가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친척들이 "일만 고되게 하는 가스름으로 왜 시집을 가느냐. 고생만 할 것을"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이 그랬다. 정덕재 노인회장 또한 젊은 날 밖에 나가서 가시리 사람이라고 대놓고 말하기를 꺼려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살기 좋고 풍요로운 부자마을이라는 인식이 넓게 퍼져있는 가시리. 풍력발전단지에 부지 임대료로 내년부터 1년에 10억원 정도가 마을회로 들어오는 놀라운 마을이다. 올해로 마무리되는 농촌마을개발사업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가시리가 꿈꾸는 미래를 물었다. 김영일 가시리장은 단호하게 "자연 그대로를 활용한 고부가가치 관광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한다. 방대한 자연적 자원을 활용하여 이룰 수 있는 마을공동체 발전전략이 치밀하다. 목장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숲과 곶자왈 같은 풍성한 자연치유 자원을 활용하여 실버타운 같은 직접적으로 주민복지와 연계시킬 수 있는 방향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마을회가 자부담과 토지 등을 내놓겠다고 해도 행정적인 결함으로 인하여 복지법인에 준하는 지원혜택을 부여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하는 발전 방향에 아직도 행정은 지극히 수동태다. 가시리는 충분히 능력이 있음을 밝히는데도. 상식이 법 밑에 밟힌 형국으로 보이는 것이다. 도민들은 유채꽃 잔치를 하는 마을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벌써 4회 째 국제트레일런 대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30여 개국 선수가 오지마라톤을 즐길만한 곳으로 가시리를 선택하는 이유를 직시하여야 한다. 담대하면서도 현실적인 선택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비전이 있다면 '힐링마로'이다. 갑마장이라는 역사적 스토리를 살리면서 치유 성격을 가진 말타기 코스를 제공하는 일. 탁 트이면서도 오밀조밀한 면모까지 보유한 가시리의 자연환경을 만끽하도록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77세 정덕재 노인회장이 107세가 되는 해에 가시리 모습은 이미 그려져 있었다. 지금 1300명 정도의 인구가 두 배는 늘어나 있을 것이며, 자연이 가장 잘 보전된 곳으로써 그 가치를 통하여 풍요를 누리는 마을. 시설 중심의 발전 전략을 추구하는 수 많은 마을들이 가시리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마을 사업으로 운영하는 유채꽃프라자 뒤편 언덕 작은 정자에 올라 가시리가 발산하는 초록빛깔에 취해 본다. 오름과 목장으로 빚어진 보물과 같은 마을이다. 길게 멀리 바라보는 마을주민들의 안목과 실천 역량에 존경을 보낸다. 특별한 곳에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개발비용보다 보전비용이 더 투입되는 경우를 상정하라면 가시리의 소중한 자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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