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천·군산·월라봉에 둘러쌓인 밖에선 볼 수 없는 '천혜의 요새'숙박시설 35곳… 주차난에 몸살, 마을발전 미명 아래 공동체 상실남제주군 시절 2종 지구단위계획, 군청에 강력 요구 불구 묵살당해행정 무책임속 도약 위해 몸부림
원래 지명은 난드르. 제주어로 '나간' '밖으로 향한'의 의미를 가진 '난'에 들판을 뜻하는 드르가 붙어서 마을 이름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문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려니 큰 들판이라는 의미로 (大坪里)라고 했다.
양행수(75세) 직전노인회장이 알려주는 설촌유래는 300년 전 쯤 창천리에 살던 양기성이라는 분이 처음으로 내려와 움막집을 짓고 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동쪽은 대동천으로 예래동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 군산이 솟아있고, 서쪽으로 월라봉이 있어 자연스럽게 창고천 냇물을 막아 서쪽 안덕계곡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안덕에서 대평리로 들어오는 길은 제주의 어느 지역보다 독특하고 얼핏 강원도 산골짝을 지나는 느낌이 든다. 서쪽 해안가에 솟은 융기절벽인 박수기정은 그 웅장함이 대평리의 모습을 절경으로 이끄는 첨병이라 하겠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부르는 지명들이 정겹다. 쇌목, 꿩망동산, 개나모루, 당캐, 마궁굴, 홀에미덕, 오짓개, 소기왓, 애기업개돌 등이 지명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땅과 바다다.
대평리는 화산섬 제주에서 가장 독특한 지형적 특징을 가진 곳이다. 가장 제주도를 닮지 않은 마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올라가다가 막혀버린 당쿨천과 마궁굴 두 개의 계곡이 마을 뒤편에 펼쳐져 있고, 마을 진입로가 높은 지대를 올라가 밖으로 나가는 경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땅은 좁은 반면 바다는 넓다. 마을에서 가시권에 들어오는 바닷가에서부터 박수기정을 지나 화순 화력발전소 부근까지가 대평리 해녀들이 대대로 해상권(?)을 행사하는 바닷가이다.
대평리 주민들이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정신적인 구심점에는 서씨 성을 가지고 살았다는 할망당이 있다. 역사적 사실은 조슨다리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서씨 할망이 당차고 리더십이 있어서 군산 부근으로 난 길로 돌아서 화순 지역까지 가야하는 비효율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가산을 털어서 석수장이들을 불러들여 암벽지대를 정으로 쪼아서(제주어로 '조슨') 가파른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로 대평리 사람들의 바깥 나들이가 이전보다 엄청나게 수월해졌다고 전해진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당을 만들어서 당신(堂神)으로 모셔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대소사나 마을 단위로 밖에 나가서 경쟁을 해야 할 때는 마을 임원들이 할망당에 가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고 마을일에 임한다고 하니 마을공동체의 정체성이 그대로 간직된 마을이라 하겠다. 암암리에 흘러내리는 진취적인 개척정신이 대평리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강웅선 대평리장.
필자가 30년 전에 대평리를 처음 찾았을 때는 참으로 아늑하고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습이 아니다. 다른 마을에 온 기분. 마을회관에서 사무장을 8년 넘게 지내신 강혜연씨는 대평리에 숙박시설만 35곳이 영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540명 정도 사는 마을에 온통 숙박시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농 반어촌이었던 소박한 마을이 불과 15년 사이에 이렇게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주민 수도 원래 살아온 주민과 외지에서 들어온 주민 수가 6대4 정도라고 한다. 조금 더 지나면 어떻게 바뀌게 될지 뻔히 보인다고 하는 대평리 주민들. 주차난에 시달린다고 하는 제주의 시골마을이다. 가장 가슴 아프다고 하는 현실은 집에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문을 잠그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제주인의 자긍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도둑을 걱정 하지 않는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를 대평리는 너무도 일찍 만나고 있다. 마을 발전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우선 개인정보와 인권의 시각에서 퇴거해왔을 경우 이장에게 도장을 받는 행정절차가 사라져버렸다. 누가 어디 들어와서 집 짓고 사는 지도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과 조상 대대로 이웃하여 형제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한 마을에서 산다는 것. 개인주의와 공동체정신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강웅선 대평리장은 농업용지의 급격한 감소를 두려움과 함께 가슴 아파 한다. 18만 평의 대평리 농경지가 최근 3년 동안 한 해 평균 6000 평 정도가 사라져간다고 하니 앞으로 10년 뒤에는 과연 대평리에 농경지가 남아있을 것인지. 제주 미래의 축소판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14년 전 오늘과 같은 현실에 대한 예측과 대비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제주군 시절에 당시 대평리 청년회 차원에서 2종지구 단위계획을 수립해 줄 것을 강력하게 군청에 요구하였지만 묵살 당했다고 한다. 군청의 입장은 의욕 없는 무사안일주의의 전형을 보여줬다. 책임 회피까지 포함하여. 남제주군의 행정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결국은 국토종합계획에 포함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하는 발뺌. 그 처절한 시절에 청년회장을 지낸 강웅선 대평리장은 죽는 날까지 통한으로 남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좀 더 강력하게 치고나가 요구할 것을.
대평리의 꿈을 물었을 때, 간명한 대답이 터져 나왔다. 다시 20년 뒤에 더 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당국에서 확고하게 능동적인 자세로 대평리 주민들과 함께 보전과 개발의 짜임새 있는 청사진을 가지고 미래를 견고하게 준비하자는 주장이다. 옳다. 자치단체에 속한 마을의 현실과 미래를 오직 중앙정부의 국토종합개발계획이라는 상명하복에 떠밀어버린 작태. 그 치졸하고 무책임한 행정 자세가 지금의 대평리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낸 실체가 아니냐고 주민들은 따지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평리처럼 단기간에 급격한 변화를 접하는 마을은 흔치 않을 것이다. 당황스러움을 감추고서 정신을 바짝 차리려는 몸부림이 느껴진다. 천혜의 풍광을 지키면 이를 활용하여 다양한 마을의 꿈을 실현 할 수 있다는 각오가 눈빛에 역력하다. 박수기정 절벽에 번지점프장을 만들자는 꿈. 황당하지만 호쾌한 꿈이다. 어촌체험마을을 통하여 주민공동의 소득을 창출하자는 생각. 당쿨천 위에 작은 저수지를 활용하여 관광자원화 하자는 아이디어에서부터 창고천 물을 끌어와서 박수기정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만들자는 용감한 창조정신까지. 대평리는 행정의 무책임 속에서 저질러진 난개발과 싸워서 이기고자 한다.
민선6기 제주도정이 내건 협치는 관료주의에 입각한 무사안일 공직자가 있는 한 공염불이 된다는 것을 대평리의 사례를 통하여 파악하여야 한다. 신속하게 대평리 주민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해 줄 행정행위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