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폐사지 풍경이 전하는 조용한 위안
현을생 사진전 '옛 절터…' 12월 5~11일 아트인명도암
터에 남은 석탑·불상 등 흑백으로 표현한 그 자리의 미학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빈 자리의 미학 사라지지 않기를"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0. 12. 01(화) 18:19
현을생의 '화순 운주사지'. 미완성의 부처가 누워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시간이 멈춘 듯한 텅 빈 폐사지에서 오히려 충만한 기운을 얻었다. 오랜 흔적이 밴 기단석과 같은 돌들이 지나온 영광을 보여주는 그곳의 풍경은 고고했다. 세속을 초월한 고풍스러움은 번다한 삶에서 잠시 비켜선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달 5일부터 제주시 봉개동 아트인명도암에서 '옛 절터, 그 자리의 미학'이란 이름으로 개인전을 펼치는 현을생 사진가다.

현 작가는 서귀포시장, 제주도 정책기획관 등을 거쳤고 지금은 사단법인 제주국제관악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40여 년 공직에 몸담았던 그는 '제주성읍마을'(1990), '제주여인들'(1998), '풍경소리에 바람이 머물다'(2006) 등 사진집을 내고 다섯 차례 사진전을 열어온 제주도미술대전 초대작가다.

익산 왕궁리사지. 작가는 이 절터에서 "이 보다 더한 예술의 극치가 또 있을까"라는 단상을 적었다.
서산 보원사지. 천년 절터로 강댕이미륵불이 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번 출품작들은 10여 년 전부터 강원도에서 전라남도까지 옛 절터를 누비며 촬영해온 것들로 흑백사진으로 인화했다. 폐사지에 발을 디딜 때마다 메모해둔 단상을 바탕으로 작품마다 짤막한 글을 덧붙였다.

그는 스님과 중생 다 떠난 원주 법천사지에서 홀로 절터를 지키는 고목이 눈물겹게 다가왔다고 했다. 경주 감은사지에선 함월산 자락으로 넘어가는 해가 비치는 동·서 쌍탑과 마주하며 새삼 동양의 미를 발견한다. 예술의 극치를 경험하게 된다는 익산 왕궁리사지, 솔바람이 넘나드는 산청 단속사지 당간지주, 백만불의 미소를 지닌 충주 미륵사지 석조여래상, 아득히 먼 시간을 붙잡고 누워있는 화순 운주사지의 미완성 부처, 천년 절터인 서산 보원사지 강댕이미륵불 등도 카메라에 담겼다.

이름난 절터도 있지만 대부분 대중에게 덜 알려진 곳이다. 손길이 닿으며 자꾸만 덧나는 절터들이 안타깝다는 작가는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빈 자리의 미학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다"고 조심스레 털어놨다. 창녕 관룡사의 야트막한 일주문처럼 곳곳에 흩어진 옛 절터들은 험한 코로나 시대를 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세를 낮추라는 조용한 가르침을 준다. 전시는 이달 11일까지. 문의 727-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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