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5)4·3의 한 기록
지식과 덕망 있는 자 한 번에 쓸려 죽고 말았다… 아! 슬프다
편집부 기자 hl@ihalla.com입력 : 2020. 04. 06(월) 00:00
은폐와 미화 시간이 흐를수록 베일 벗어
삶과 죽음 오로지 저들의 마음먹기 달려
4·3 70년이 넘도록 온갖 방해에 시달려

김산의 '감금된 사람들'(2014, 혼합매체)
지나간 역사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그 역사가 현재의 자신들을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 역사로 인해 전도양양한 실권을 누리면서 온갖 호혜를 받았던 무리들이 냉전의 기류가 사라지고 시민들의 역사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념의 가혹한 피해를 당했던 지난 4·3이 다시 호명되고 재조명된다. 그 원인을 찾든, 그 의미를 묻든, 살아있는 사람의 기억을 시도 때도 없이 환기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공포이다.

역사의 길에 서 있었던 자신의 행적은 설령 생을 하직하더라도 그 이름 석 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당대에서는 어떤 행위가 은폐되고 미화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베일은 후대에 의해 벗겨진다. 역사의 다음 공포다.

#4·3 동시대인의 역사 기록

4·3 동시대인이라고 하면 4·3시기를 겪었던 사람을 말한다. 차라리 꿈이라면 좋았을 끔찍한 시기를 살아낸 한 지식인의 기록은 70년이 흐른 지금도 의미심장하게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1885~1956)은 제주사람으로 항일 의병에 가담했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1915년 31세에 편년체 역사서인 '탐라기년(耽羅紀年)'을 저술했고, 그 후 37년을 넘긴 1952년 68세에 '탐라기년(耽羅紀年)'의 부록을 지었다. 여기에 심재는 4·3의 기록을 남겼는데 1976년 제주도 교육위원회에서 발행한 '탐라문헌집'에 '탐라기년(耽羅紀年)'이 실렸으나 부록(附錄) 부분은 볼 수 없었다. 2015년 오문복 선생의 감수와 홍기표, 백규상, 김새미오, 손기범 등 젊은 연구자들의 번역으로 새롭게 '탐라기년(耽羅紀年)' 완간을 제주문화원에서 선보였는데 여기에 실린 심재의 4·3 기록은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었다는 점, 제주 학자로서의 역사인식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막달레나 아바카노비츠의 '앉아있는 인물들'(입체)
무자(戊子, 1948년). [건국준비 4년. 단기4281년. 이 해에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4월 3일. 산군(山軍) 소동이 발발하였다. 작년(1947) 3월 1일 이후로 경관대가 위력을 자행하여 조금이라도 관의 주변에 혐의가 있는 자는 모조리 잡아다가 죄를 조작하다 끝내는 고문하는 중에 몇 명을 죽였는데 [조천지서와 모슬포 지서에서 고문하다 죽음에 이른 자가 2명이다.] 모두 병사했다고 속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장차 아침저녁으로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다. 이에 일단의 피의자들이 무리를 모아 산속으로 피하여 몰래 일을 꾸몄다. 마침 국회의원 선거를 기회삼아 일시에 각 선거구역을 습격하여 인명을 살해하거나 면사무소를 불살랐으니 이것이 이른바 4·3사건이다. 이로부터 경관지서, 면사무소, 민간부락을 습격함이 거의 매일 이어졌고, 정부가 파견한 군대 중에도 산군에 호응하여 산속에 들어간 자도 있었다.

○9월, 9연대장 송요찬(宋堯讚)이 촌락을 불태워버리고 살육을 크게 행함이 수개월에 이르렀다. 이름 있는 마을과 오래된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생명과 자산이 거의 몰락하였다. ○도청이 불에 탔다.

○12월,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이 잔당 소탕하고 장차 서북민을 본도 안에 정착시키려 하려다 마침 내무장관 신성모(申性謨)가 선무(宣撫)하고 훈시함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살피건대, 송요찬과 함병선의 전후 소탕은 아! 참혹하도다. 이때를 당하여 양 사이에 끼인 자 어찌하면 좋았으리요? 이미 산군의 공갈에다 다시 군과 경찰의 위협에 핍박받고 또 서북청년의 발호에 겁박당하며, 삶과 죽음이 오로지 저들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어 살인을 풀 베듯하여 붉은 핏물이 길에 널렸다. 아! 산중에 포로가 되지 않으면, 마땅히 군과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총칼아래 죽어야 끝이 났을 것이다. 이에 사람마다 두렵고 무서워하여 죽는 것이 옳은 것인지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리가 돌아보고, 매가 주시하는 듯하니 아침에 살아 있는 목숨은 저녁에 기약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산중으로 피해 들어감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히 유사 이래 일찌기 없었던 참화라 말할 수 있다. 1949년(기축) 봄에 내무장관 신성모가 내도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살육의 정책이 그쳤다. 하지만 1950(경인)년 6·25까지 이어졌고, 조금이나마 지식과 덕망 있는 자는 한 번에 쓸려 거의가 죽고 말았다. 아! 슬프고 또 슬프도다.

기축(1949). [단기4282년.]

봄. 내무 장관 신성모가 내도하여 살육을 금하고 산간에 격문을 날려 귀순하면 생명을 보장할 것을 간절히 알리니 수십일 사이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군과 경찰에서 죄의 경중을 따져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이 후로 귀순치 않아 탕평의 희망이 끊겼다(홍기표 외 역. 원문생략)

프란시스 고야의 '전쟁의 참화' 중 '학살'(판화).
#심재의 절규

심재는 우리가 줄곧 들어온 폭도라는 말 대신 산군(山軍)이라는 말을 쓴다. 산군은 민간인으로 산으로 간 자위적 민병(民兵)을 일컫는다. 언어에 물든 이데올로기 때는 좀처럼 벗겨내기가 어려운데 폭도라는 말은 후에 여순항쟁을 계기로 빨갱이로 대체되면서 오늘날에도 보수 국회의원들과 극우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이념의 담론으로 진화돼 좌빨(좌익빨갱이)로 탄생했다.

그리고 심재는 지서 경관에 의한 고문, 린치 도중 살해된 사건을 병사(病死)했다고 한 사실, 이의 사실을 알고 두려운 사람들의 피신, 연대장을 피살한 군인들의 산군 가담, 물불 가리지 않는 송요찬의 토벌로 인한 살육 속에서 토벌대와 산군 사이에 낀 민중들이 겪는 극도의 불안감 표현, 그리고 2연대장 함병선의 서북민(평안도 황해도)의 제주 정착시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또 서북청년단의 미친 광기(光氣)의 잔혹성은 지금도 제주도민들의 기억에 공포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귀순한 도민들의 대의도 저버리고 오로지 총칼로 해결하니 사태가 더 악화된 점을 애석해 하고, 옛 고을이 잿더미 되고 덕망있는 자 모두 사라졌으니 큰 탄식을 한다.

#4·3이 걸어온 길

하워드 진은, "과거 범죄를 하나하나 이야기할 때, 그 때 누가 잘못했는가?라고만 묻고, 그런 뒤 직접적으로 "지금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질문은 무의미하다."라고 했다. 역사가 가르치는 것은 그때의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역사가 다시 나쁘게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역사의 교훈이다.

이문교(전4·3평화재단 이사장)는 '제주4·3논담'에서, 그간 70년간 걸어온 4·3의 길을 돌아본다. "한 때 순조로운 길을 가던 4·3은 보수 정부의 등장으로 새로운 탄압을 받아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약칭: 博朴9년)는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 내의 보수 세력이 4·3을 압박했다. 정부는4·3중앙위원회 폐지를 기도(企圖)했고, 국정 역사 교과서를 통해 4·3의 왜곡과 폄훼를 시도했다. 뉴라이트 그룹의 역사 교과서 공세도 있었다. 사법제도를 악용한 헌법소원, 국가소송, 행정소송을 수시로 제기하여 4·3해결을 무력화하려 했다. 제주4·3평화상에 대한 긴급 감사, 정부 출연금의 동결을 통해 4·3평화재단의 사업을 위축시켰다. 4·3추념일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반대하는 화형식 난동, 특정 희생자 위패 철거 압박, 보수 학자들의 이념적 망언 등 올바른 4·3 역사에 대한 집단 기억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방해작업을 해 왔다. 박박시대의 자화상이다. 그 시기에도 제주민은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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