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8)
편집부 기자 hl@ihalla.com입력 : 2019. 04. 18(목) 20:00
강준 작/고재만 화

3-2. 꿈 그리고 별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따라 간간이 바람이 불어왔으나 아스팔트의 열기를 밀어내진 못했다. 그들은 거대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자신들의 첫 미팅이 잘되길 빌면서 경건한 미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들은 지하도 그늘에서 햇볕을 피하다 교보문고를 발견했다. 책하고 거리가 먼 종필이 먼저 들어가 보자고 제안했다.

삽화=고재만 화백
넓은 객장의 시원함에 놀라고, 서가에 촘촘히 꽂혀 있는 엄청나게 많은 책에 놀랐다. 신기해서 이것저것 들쳐 보며 어슬렁거리다 약속이 1시간 남았는데 종필이 나가자고 채근했다. 양산을 쓰고 오가는 사람들이 동상 앞에서 까불대는 그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지나갔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용찬의 몸은 얼어붙어 눈썹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얀 드레스에 새하얀 피부. 얼굴 가득 웃음꽃이 핀 소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선녀였다




약속했다는 시간이 다가오자 종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타날 여학생들에 대한 기대감에 용찬의 얼굴에도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기다리는 여학생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자 기대감은 초조감으로 바뀌었다. 종필은 연신 시계를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차가 막히나?' '여자들은 조금 늦는 법이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나?' '편지를 못 본 건가?' 어색한 표정으로 금산과 용찬의 눈치를 살폈지만 서로 난감해서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딴청을 부렸다.

땡볕에 피부가 적당히 익어 갈 무렵 금산이 종필을 불러 세웠다.

"종필아 종쳤다.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노? 서울 년이 뭐가 부족해 촌놈을 만나겠냐, 이 문디 자식아. 그만 치아 뿔고 밥이나 묵자. 배고프다."

금산이 부산 사투리를 쓰며 의기소침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종필이 혀를 쩍 하고 차더니 청춘사업 종결을 선언했다.

"미안하다. 빵 사주며 잘 꼬셨는데 여우 같은 애한테 당했다. 우리 이모 집으로 가자. 가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전화하고 올게."

종필은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고는 전화 부스 있는 데로 황급히 걸어갔다. 땀에 젖은 그의 등짝을 바라보던 금산이 자책을 했다.

"저 미련 꼴통에 속아서 따라온 우리가 밥통이지."



그늘에서 땀을 들이고 있는데 종필이 싱글벙글 웃으며 쪽지를 들고 왔다.

"마침 해연이도 집에 있더라구. 너희들 얘기도 했어. 맛있는 거 만들어 놓을 테니 빨리 오래."

"어디 봐."

금산이 종필에게서 쪽지를 빼앗아 들고 살폈다.

"니들 지하철 처음 타보지? 부산에도 지하철 있거든. 내 다 아니까 따라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서울은 땅속에도 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걸 알았다.



종필이 메모를 확인하며 출구를 찾아 나가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십여 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 앞에 검은 세단이 섰다. 문이 열리더니 '오빠'하고 소리치며 한 소녀가 뛰쳐나왔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용찬의 몸은 얼어붙어 눈썹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얀 드레스에 새하얀 피부. 얼굴 가득 웃음꽃이 핀 소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선녀였다. 심장은 텅텅 요동쳤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용찬은 기침하는 척 고개 돌려 몰래 심호흡을 했으나 뛰는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화려한 금빛 장신구로 무장한 이모가 선글라스를 낀 채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자 종필이 친구들을 소개했다.

"해연이 너도 인사해. 오빠 친구들이야."

"안녕하세요? 장해연이라고 합니다."

"덥다. 어서 타라."

차에 오르며 금산이 용찬에게 소곤거렸다.

"와우. 종필이랑 종자가 다른 거 같은데? 예쁘지?"

승용차 안은 냉방이 잘되어 있었지만 용찬의 얼굴은 식을 줄 몰랐다. 해연의 뒷모습도 바라보질 못해 고개를 숙였다. 그걸 눈치챈 금산이 용찬의 옆구릴 쿡 찌르며 주책을 부렸다.

"야, 용찬아 너 어디 아프냐?"

그러고는 심술궂게 용찬의 얼굴을 만졌다.

"얘 봐, 아침에 먹은 김밥이 체했나? 얼굴에서 열이 나."

그 말에 해연이 돌아다 봤다.

"집에 급체약 있어요. 조금만 참아요. 거의 다 왔어요."

체하면 원래 손발이 찬 법이다. 그런데 소화된 지 오랜 김밥까지 동원하며 난처하게 만든 금산이 얄미웠다. 용찬은 졸지에 급체 환자가 됐고, 금산은 고소해서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고 혼자 키득거리며 숨죽여 웃었다.



연못가에 핀 온갖 꽃들을 보며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은 영화 속 장면처럼 화려했다. 하얀 양털 가죽이 깔린 소파에 앉았으나 마음은 편치 못했다.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온 해연에게 이모는 환영의 곡을 요청했다.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해연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옥처럼 빛을 내며 건반 위에서 춤을 추면 그녀의 얼굴에서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심취한 듯 살포시 눈을 감은 그녀에게서 감히 범접 못 할 예술가의 정취가 느껴졌다.

저녁을 맛있게 먹은 후 다시 거실에 모여 앉아 TV를 시청했는데 영화관처럼 큰 컬러 티브이에 모두 놀랐다.



늠름한 중년의 사진이 걸려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에는 외국 서적들과 미니어처 술병들이 장식장을 채우고 있었다. 이모가 장롱에서 꺼내준 이부자리를 배정받고 나란히 누웠다.

"이모부는 안 계셔?"

금산이 집에 남자 없음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이모부는 무역업을 하는데 자주 해외에 나가신대. 이모가 애를 못 낳는가 봐. 그래서 해연이 이모랑 같이 살게 된 거야."



"난 우리 선조들이 호령했던 중국엔 꼭 한번 가보고 싶어"
그런데 금산이 뜬금없는 소릴 했다
"난 행복하게 살 거야.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해"




삼총사는 각자의 꿈을 이야길 했다. 금산의 꿈은 등치답지 않게 소박했다.

"자동차가 저렇게 많으면 차 수리하는 정비공이 필요할 거 아냐? 난 정비를 배울 거야. 이담에 너희들 차 고장 나면 공짜로 고쳐 줄게."

용찬은 과연 자신이 자동차를 운전하게 될 것인지 의심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종필은 아버지 건설 회사를 이어받겠다고 했다.

"난 중국에 가서 집을 지을 거야. 사람이 많잖아? 그러니까 집도 많이 필요할 거고."

가만히 듣던 용찬이 초를 쳤다.

"형, 중국은 사회주의 나라여서 모든 집은 나라에서 지을걸?"

그러자 금산이 재판관처럼 평결을 내렸다.

"용찬이 말이 맞아, 헌데 개방이 되어서 사업은 할 수 있대."

"그래, 건설 사업 한다구. 임마."

"나도 돈 벌면 중국에 가서 장사할 거야. 인구가 13억이거든? 10원씩만 팔아도 130억 원이나 되는데 운만 좋으면 떼돈 벌 수 있어. 앞으로 나 중국 놈이라고 무시하지 말어."

종필이 용찬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었다.

"난 아직인데, 우리 선조들이 호령했던 중국엔 꼭 한번 가보고 싶어."

그런데 금산이 뜬금없는 소릴 했다.

"난 행복하게 살 거야.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해."



그들은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에어컨이 시원해선지 금방 코 고는 소리가 이중창으로 들렸다. 용찬도 눈을 감았으나 해연의 얼굴만 떠오를 뿐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 뒤척이다 오줌이 마려워 주섬주섬 바지를 찾아 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화장실 앞에 잠옷 차림의 선녀가 서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말리던 해연이 눈이 마주치자 앙증맞게 웃었다. 용찬은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해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며 다가왔다.

"오빠, 화장실 찾으세요?"

리화가 부를 때는 아무런 감흥을 못 느꼈는데 해연에게서 듣는 오빠라는 소리는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목 언저리에 레이스가 달린 잠옷이 해연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잠이 안 와서요. 촌놈이 서울 오니 설레는가 봐요."

"어머 말씀 낮춰요. 오빠 친군데."

"실은 나 고1이에요."

"어머, 어쩐지 두 오빠랑 안 어울린다 생각했어요."

"안 어울린다니요?'

"두 오빠는 날라리 티가 나는데 오빠는 얌전하고 잘 생겼잖아요."

용찬의 심장이 물레방아처럼 뛰놀았다.

"저기 앉아요. 마실 것 갖다 줄 테니 티브이 보면서 잠을 청해 보세요."

말을 하면서 해연은 주방으로 갔다. 용찬은 아랫도리가 묵직함을 느꼈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보니 탁자 위에 주스 한 잔과 티브이 리모컨이 놓여 있을 뿐 해연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그들은 덕수궁에 갔다. 부모와 같이 온 어린애들도 많았다. 덕수궁에선 '한국 근대 회화 백선'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해연은 그림에도 관심이 많은 듯했다. 종필과 금산은 그냥 쑥 한번 훑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지만 용찬은 해연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장미꽃 무늬의 원피스가 나풀거릴 때마다 풍겨오는 향긋한 향기에 취해 그녀의 그림자가 되었다. 용찬이 잠시 생각에 빠져 멍하니 서 있었는데 해연이 그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순간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이 짜릿했다.

"아이, 오빠 징그럽게 왜 이래요? 이리 와요."

정신을 차리며 그림을 보았는데 웬 벌거벗은 여인이 용찬을 보며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용찬은 무안해서 고개를 숙였다.

"깜빡 무슨 생각하느라고..."

"피이, 무슨 생각?"

감각에 겨워 용찬이 대답을 못하자 해연이 손을 획 뿌리쳤다. 그리고는 '이 오빠들 어디 갔지'하면서 후다닥 뛰어갔다. 해연의 얼굴이 붉게 변하고 있는 것을 용찬은 보았다.



그때 해연은 중학교 3학년이었고 피아노 렛슨 받으며 예술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여행으로 용찬의 가슴 속엔 별 하나가 생겼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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