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 상찬계(相贊契)와 '만덕'의 상상력

교육문화체육부장 진선희

진선희 기자 / sunny@ihalla.com    입력 2018. 11.26. 00:00:00

전남 강진 출생의 이강회(李綱會, 1789~?). 정약용의 제자였던 이강회는 우이도에 유배온 제주 사람 김익강(金益剛)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제주에서 벌어진 큰 옥사 사건에서 '민중적 영웅'으로 불릴 만한 이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거였다. 그 인물은 김익강과 사돈 관계였던 양제해(梁濟海, 1770~1813)였다.

이강회는 그가 관료 집단의 부패상을 타파하려한 제주인이었다고 여기고 때때로 분노에 찬 표현을 써가며 그 실상을 적어나간다.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에 실린 '상찬계시말(相贊契始末)'이 그것으로 이강회의 기록은 '양제해 모변(謀變)'으로 불렸던 정부 측 자료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상찬계는 제주도의 진무사(鎭撫使), 향리(鄕吏), 가리(假吏) 등 이서층 300여명으로 결성된다. 그 이름처럼 고위직 관리에서 말단까지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무리지어 찬조(상찬)하는 이권조직이었다. 이들은 제주목사와 결탁해 세금 징수, 상거래, 관직 임명 등에 개입해 뇌물을 챙기는 등 갖은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양제해는 제주목의 향감을 네 번, 찰방헌리(察訪憲吏)를 두 번 지냈다. 1813년 그가 제주목 중면의 헌장직을 맡았을 때 여러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울분을 토했다. 간악한 향리들로 인한 민폐가 갈수록 심해져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다며 양제해에게 장두로 나서달라고 청한다. 평소 양제해를 경계해오던 상찬계의 핵심 인물들은 이를 부풀려 제주목사에게 변란을 도모한 사건으로 보고했고 그는 끝내 옥에서 숨을 거둔다.

이강회는 '탐라직방설'에서 상찬계가 신해년(1791)이나 임자년(1792)초에 시작되었고 갑인년(1794) 이후 임신년(1812)이나 계유년(1813)까지 크게 왕성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 기간 제주 백성들은 '살갗이 다 벗겨지고, 살이 다 발라지고, 피가 다 마르고, 뼈가 다 부수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이같은 '상찬계시말'은 현행복이 옮긴 단행본 '탐라직방설'이나 박찬식의 논문 '양제해 모변과 상찬계' 등을 통해 제주사회에 그 가치가 알려졌다.

상찬계가 존재했던 시기에 김만덕(1739~1812)이 살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뒤따른다. 조선시대 여인의 몸으로 상당한 부를 일구고 거상이 되는 과정에 상찬계의 영향은 없었을까. 제주 사회를 장악했을 상찬계이기에 드는 궁금증이다. 제주 소설가 조중연도 상찬계를 등장시킨 장편 '탐라의 사생활'에서 그 대목에 주목했었다. 문학적 상상력이 역사적 진실에 가닿을 때가 있다.

이런 점에서 제주시가 제주 여인 김만덕의 업적을 알리겠다며 제작한 창작뮤지컬 '만덕'은 평면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녔다. '만덕 전국화'를 위한 맞춤형 작품이어서일까. 조실부모한 절망의 유년기를 거친 뒤 만덕은 시종 선하고 완벽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역사 속 인물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둬놓고 출발한 탓에 극은 '조선후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여성CEO'라는 종착지만 보고 달려가는 형국이었다.

뮤지컬 '만덕'은 지난 1월과 10월 총 12회에 걸쳐 제주에서 공연됐고 내년엔 다른 지역으로 향할 예정이다. 서울 공연이든, 지역의 뮤지컬 축제에 참가하든 극의 내용에 더해 출연진과 스태프 짜임새를 봤을 때 '제주산'이라고 부르기 주저해지기 때문인지 제주 공연계의 어떤 이는 "이제라도 멈추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만덕'에 투입된 예산은 14억원이다. '김만덕의 삶과 그 정신을 기리고 본받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제주시 건입동 김만덕기념관의 올 한해 예산(약 9억8000만원)을 웃돈다.

한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