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시간이 턱괸 도시, 축축한 날 건너는 이들

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진선희 기자 / sunny@ihalla.com    입력 2018. 11.16. 00:00:00

시인의 곁에 사는 또 다른 시인은 말했다. 그의 시 속엔 걸으면서 만난 얼굴들이 있다고. 차창 밖으로 휙휙 스치는 장면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시인은 세밀한 풍경화를 그려내듯 어느 날의 사연을 가만가만 들려준다. 제주 현택훈 시인의 세번째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이다.

'서귀포시 구 시외버스터미널 옆 카페 우군/ 버스 몇 대 놓쳐도 괜찮아/ 유리가 없다면 깨질 걱정을 하지 않듯/ 투명한 벽을 만들진 않으니까 서귀포 씨/ 칠십 리 펼쳐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면/ 칠십 리 주유소 그곳에서 이어지는 길/ 유동 커피 마시며 오르는 오르막길/ 지치면 이중섭거리에 이중섭처럼 주저앉지'('서귀포 씨 오늘은' 중에서)

서귀포시 원도심을 저벅저벅 걸어가는 시인이 그럴까. 옛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삼매봉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서귀포시내는 '시간이 턱을 괸' 표정이다. 볕좋은 날, 이중섭거리 근처 어느 카페에 앉아 한 때를 보내본 이들이라면 그곳이 주는 아지 못할 평온함, 어떤 이는 나른함이라 부르는 순간이 떠오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도시엔 남국의 낭만만 있는 게 아니다. 해마다 풍년인 귤로 감귤 썩는 향기가 바람에 날리고('귤림서원'), 철쭉이 있던 화단에 자전거 거치대가 들어서고 비오는 날에도 지중화 공사가 한창인('시 쓰기 좋은 도시에 삽니다') 곳이다. 시인에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안겨준 '곤을동'이나 뒤이어지는 '제주 고사리'엔 '불길처럼 한라산을 덮은 이야기'인 제주4·3이 자리한다.

아이들은 푸르른 청춘을 고대하지만 현실은 축축한 나날들이다. '졸업도 하기 전 현장실습에 나갔고, 차가운 기계를 혼자 움직였다 기계는 얼어붙은 채 시간을 움직였고, 소년은 육중한 프레스에 머리가 깔렸다'('겨울 독서실').

'흩어진 별빛'이란 이름을 가진 친구 성환은 또 어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성환의 목소리로 읊은 '성환(星渙)'을 통해 시인은 마지막 가는 길에서야 친구의 바람대로 시를 쓴다. '내가 이렇게 운구차에 실리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처럼 날 들어주지도 않고 날 위한 시를 쓰지 못한 네가 무슨 친구냐며 시인이냐며 그런 시인 친구 필요없다며 양지공원 어두운 한낮에 흩어진 별빛들이 구름의 목울대를 가득 채우며'('성환'중에서). 걷는사람. 9000원. 진선희기자

한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