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이재수와 평리원(平理院)

김경섭 수습기자 / kks@ihalla.com    입력 2018. 11.08. 00:00:00

정동의 가을 길은 멋지다. 노란 은행잎 밟으며 덕수궁 돌담길에 접어들면 곧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나온다. 옛 건축물 중 남겨진 전면부(파사드·Facade)는 르네상스식 아치형인데 본새가 고풍스럽다. 이 건물터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으로 시작하여, 독일공사관, 상소심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 토지조사국, 독립투사를 억압하던 일제의 경성재판소, 해방 후 1995년까지 대법원을 거쳐, 2002년부터는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어졌다. 제주 출향인이 이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무심하게 지나치지 못하는 까닭이 있다. 신축민란의 세 장두가 사형판결을 받은 곳이어서다. 대한제국 평리원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때는 1901년 5월, 제주 섬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신축민란이 일어났다. 제주의 민초들이 봉세관의 세폐(稅弊)와 천주교의 교폐(敎弊)를 척결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제주성이 함락되었다. 30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창의군(倡義軍)에 죽임을 당하고서야 민란은 끝이 났다. 대한제국 정부가 진압군을 파견하고, 천주교에서 구원 요청한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위로 신축민란의 지도부는 백성들의 무죄방면을 요구하며 자수를 하였다.

세 장두가 옥에 갇혔을 때, 섬나라 온 마을 수백 명이 부녀자들이 제주목관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찰리사(察理使) 황기연에게 세 장두는 삼읍민을 위하여 의거한 것이니, 봉세관 강봉헌과 창의군의 세 장두를 제주목에서 심판해 주기를 간곡하게 울면서 탄원하였다. 만일 어쩔 수 없이 한성으로 압송해야 한다면, 봉세관 강봉헌 혼자만을 데려가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7월 18일 신축민란의 지도부를 일본에서 임차한 화륜선(火輪船)에 태워 인천으로 데려간 다음, 삼엄한 경비하에 경인철도를 이용해 한성감옥으로 압송했다.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장두는 10월 8일 평리원(平理院) 결심재판이 끝나고, 10월 9일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그들은 바로 그날 밤 한성감옥에서 서둘러 교수형에 처해졌다.

신축민란에 대한 평리원의 재판관은 법관양성소 교관이었던 프랑스인 그리마시, 프랑스 외방선교회가 파견한 제주성당의 구마실과 문제만, 그리고 서울 약현성당의 정도세 신부, 궁내부 고문관인 미국인 샌즈 등 모두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찰리사의 객관적인 현장보고와는 별도로 민란의 원인을 재심사하였다. 재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천주교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인 아전인수식 결론으로 끝이 났다. 민란의 원인 제공자인 봉세관은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무죄방면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아 다시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고향인 평안도로 떠난 뒤였다. 대정현 군수를 지낸 채구석(蔡龜錫)도 세 장두와 함께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그는 그날 밤 교수형 집행을 면제받고 나중에 석방되었다. 교폐의 당사자로 재판을 받아야 할 신부들이 심판관으로 관여하고, 세폐의 원흉인 봉세관을 무죄 석방하는 평리원의 재판이었다.

117년 전, 덕수궁 돌담길의 가을은 이토록 을씨년스러웠다. 예부터 섬나라 민란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은 장두의 하나같은 운명이었다. 왕실의 곳간 지기였던 봉세관의 뒷배와 천주교를 지켜주던 외세, 그리고 채구석의 한성 연줄은 막강했다. 장두 이재수가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대한제국 그 가을의 돌담길 풍경은 어떠하였을까? 아니 그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미술관 앞 작은 숲 그늘에는 덕수궁 돌담 너머 중화전을 바라보는 슬픈 얼굴을 한 조각상이 서 있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한라일보